재산 취급받던 종과 감옥에서 형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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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피에서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바오로 사도와 실라스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로마 바오로 대성전 프레스코화. |
‘필레 16’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보통 성경의 이름과 함께 장과 절을 표시하는데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에는 장을 표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것으로 보는 이 편지는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필레몬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그리스어로 보면 1575개 낱말로 쓰였습니다. 그렇기에 필레몬서는 장의 구분 없이 절로만 표시합니다. 필레 16은 필레몬서 16절입니다.
사적으로 보낸 짧은 편지
이 짧은 편지는 하나의 장으로 되어 있다는 특징도 있지만, 그 내용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다른 편지와는 구분됩니다.
다른 바오로 서간이 그가 세운 공동체에 보내는, 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반면에 필레몬서는 한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필레몬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 머물러 있던 마지막 시기에 쓴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략 55년쯤입니다. 이 편지 역시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쓴 것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스스로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나 바오로”라고 편지의 서두에서 인사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본문에서도 표현되는 것처럼 “사랑하는 협력자 필레몬”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 외에 필레몬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편지에서 보면 필레몬은 어느 도시인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가정 교회(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를 이끌어 가던 공동체의 봉사자였습니다.(필레 2)
그는 공동체와 신자들을 향한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바오로 사도는 그의 이러한 점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믿음 안에서 더욱 굳건해지도록 그에게 요청합니다.(필레 6)
필레몬서의 가장 주된 내용은 오네시모스로 불리는 한 명의 종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네시모스는 필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필레몬은 자신의 종을 바오로 사도에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쓸 때에 오네시모스 역시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믿음 가진 종, 쓸모 있는 사람 되다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필레 13)이라고 말하는 바오로 사도의 글을 보면 필레몬은 자신의 종을 바오로 사도의 시중을 들도록 보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감옥에 함께 있던 오네시모스는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오네시모스를 원래 주인이었던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닌 형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주기를 부탁하는 것이 필레몬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오네시모스라는 이름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의 이런 의미와 함께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필레 11-12) 이와 함께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가 이전에 잘못한 것이 있다면, 혹 빚을 진 것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고 덧붙입니다.(필레 18)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
이처럼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필레몬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라는 사실을 잘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사람은 그가 주인이건 종이건, 남자거나 여자를 떠나서 모두 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노예가 합법이었고 노예는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던 당시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종을 더 이상 종이 아닌, 바오로 사도와 똑같은 형제로 받아들여 주기를 청하는 편지의 내용은 믿는 이들의 형제애가 단지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 우리에게 믿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들은 주님 안에 형제라는 말은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안에서 형제로서의 실천이, 형제애의 실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서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