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7년 10월 30일 가해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dariaofs 2017. 10. 30. 05:28

 

 

 

 

강론   :   (루카 13,10-17)

 

<등 굽은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 주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13,10-13).”

 

이 이야기에는 여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청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그 여자를 보셨고, 고쳐 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 일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것을 잘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는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인류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자를 고쳐 주신 일은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해방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구원자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회당장은 여자가 얻은 해방과 구원은 보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만 보았고,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도 목숨이 위험한 응급환자라면

안식일에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응급환자가 아니라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응급환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치료를 하루 뒤로 미루어도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라는 회당장의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즉 이 말은, 환자가 아니라 의사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고,

예수님께서 치료비를 받기 위해서 여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정말로 예수님께서 치료비를 받으려고 여자를 고쳐 주셨다면,

회당장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일’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안식일보다 위에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사랑 실천은 언제나 항상 해야 하는 일인데,

안식일에는 특히 더 많이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루카 13,15-17).”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면서도,

소나 나귀보다 더 귀한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을 반대하고 있으니,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소와 나귀는 그들의 재산이지만, 그 여자는 그들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규정을 안 지키면서,

자기들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는

안식일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회당장을, 또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 망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즉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병마에 시달리는 병자였지만,

회당장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자들,

즉 영혼이 병들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참된 해방을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몸의 억압보다 영혼의 억압이 더 큰 억압입니다.

몸의 해방보다 영혼의 해방이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꾸짖으시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 말씀들은 모두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의 훈계’입니다.

좋은 예가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화가 나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그가 미워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가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에게 ‘사랑의 훈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잠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교훈을 물리치지 말고, 그분의 훈계를 언짢게 여기지 마라.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 3,11-12).”

사랑이 없다면 꾸지람도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신풍성당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