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씨족(동족)의 시조로부터 족보 편찬 당시 자손까지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씨족(동족)이란 성(姓)과 본관(本貫)이 같아서 동조의식(同祖意識)을 가진 남계친족(男系親族)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여러 족보에는 씨족(氏族)·본종(本宗)·종족(宗族)·종(宗)으로 나타나 있다.
족보는 동족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역사이기 때문에 족보를 통하여 종적으로는 시조로부터 현재의 동족원까지의 세계와 관계를 알 수 있고, 횡적으로는 현재의 동족 및 상호의 혈연적 친소원근(親疎遠近)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가계(家系)의 영속과 씨족의 유대를 존중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족보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따라서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며, 씨족을 단결하고, 소목(昭穆: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을 분별하는 등 동족집단의 본질을 여실히 나타내준다. 족보는 이처럼 동족결합의 물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동족조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가계의 기록 혹은 가족계보의 서(書)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개별적인 가계기록인 가첩(家牒)·가승(家乘)·내외보(內外譜)·팔고조도(八高祖圖) 등도 족보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가첩이나 가승은 동족 전부가 아닌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 초록한 세계표를 지시하는 것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대체로 족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족보에 수록되는 동족의 범위에 의하여 족보를 구분하면 일반적으로 족보라고 부르는 한 동족(동성동본) 전체의 계보, 한 동족 안의 한 분파(分派)의 세계에 한하는 파보(派譜), 국내 족보 전반을 망라하는 계보서의 3종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족보의 일반적인 명칭에 대해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족보를 조사하여 보면, 세보(世譜)·족보·파보를 비롯하여 60여 종이나 된다. 이를 빈도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족보의 수임).
세보(1,031), 족보(493), 파보(473), 가승(家乘)(41), 세계(世系)(32), 속보(續譜)(31), 대동보(大同譜)(31), 가보(家譜)(29), 가승보(家乘譜)(24), 계보(系譜)(23), 보(譜)(7), 자손보(子孫譜)(6), 대보(大譜)(6), 세적보(世蹟譜)(6), 종안(宗案)(5), 세덕록(世德錄)(5), 소보(小譜)(5), 지장록(誌狀錄)(5), 선원보(璿源譜)(3), 수보(修譜)(3), 약보(略譜)(3), 문헌록(文獻錄)(3), 실기(實記)(3), 가사(家史)(3), 총보(總譜)(3), 선보(璿譜)(2), 연원보(淵源譜)(2), 화수보(花樹譜)(2), 녹권(錄卷)(2), 분파지도(分派之圖)(2), 통보(通譜)(2), 가첩(2), 삭원보(朔源譜)(2), 연보(年譜)(1), 완의문(完議文)(1), 전보(全譜)(1), 지보록(支譜錄)(1), 세헌록(世獻錄)(1), 대종보(大宗譜)(1), 파록(派錄)(1), 세기(世紀)(1), 대동종보(大同宗譜)(1), 세승(世乘)(1), 세가(世家)(1), 외보(外譜)(1), 경편보(輕便譜)(1), 세첩(世牒)(1), 구보(舊譜)(1), 삼응보(三應譜)(1), 보계(譜系)(1), 세고(世稿)(1), 종표(宗表)(1), 가장보(家藏譜)(1), 일통보(一統譜)(1), 파첩(派牒)(1), 실록(實錄)(1), 외계(外系)(1), 세감(世鑑)(1), 회중보(懷中譜)(1), 파별록(派別錄)(1), 분가보(分家譜)(1), 세적(世蹟), 기타(6)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족보의 명칭을 정리하여 보면 ‘세보’라는 명칭이 가장 많다. 다음이 족보, 파보의 순서인데, 이 세 가지를 합하면 전체의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 흔하게 쓰는 ‘종보(宗譜)’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으며, 월남이나 유구(琉球)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가보(家譜)’라는 명칭이 거의 30번이나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족보는 수록되는 동족의 범위에 따라 한 동족 전체의 계보와 한 동족 안의 일파만을 포함하는 파보로 구분한다.
첫째, ‘대동보’의 명칭을 가진 것이다. 대개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대동보’, ‘대종보’, ‘대동세보’, ‘대동종보’, ‘대보’는 보통 ‘파보’보다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파보를 의미하기도 한다(예:≪김해김씨 대동보≫, ≪옥천육씨 대동보≫). 둘째, ‘대동보’의 명칭 이외에 파명을 부기한 것이다(예:≪전주최씨 문영공 대동보≫). 셋째, ‘족보’, ‘세보’의 명칭을 가진 것이다.
‘족보’, ‘세보’ 명칭의 족보는 동성동본의 동족 모두를 포괄하는 것도 있지만, 동성동본 가운데 그 일파만을 포함하는 파보도 상당히 있다. 특히, 대성(大姓)의 경우는 거의 전부가 그러하다(예:≪전주 최씨 세보≫. 전주 최씨 세보라는 명칭으로 1925년, 1928년, 1935년, 1937년, 1940년 등 15년 사이에 5회나 간행되었는데, 각기 편자와 발간지가 다르며 또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동족성원도 다르다. 다시 말하면 세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파보인 것이다).
넷째, ‘족보’, ‘세보’의 명칭 외에 파명을 부기한 것이다(예:≪해주오씨 관북파 세보≫, ≪전주김씨 세보≫(장파), ≪순흥안씨 제3파세보≫). 다섯째, ‘파보’의 명칭을 가진 것이다. ‘파보’의 명칭을 가진 파보에는 다만 ‘파보’라는 명칭만을 가진 것(예:전주최씨 파보)과 파명을 병기한 것이 있다.
그리고 파명을 병기한 파보에는 파명이 지명인 것(예:광주안씨 김해파보, 수원백씨(마산)파보, 안변청주 한씨파보), 파명이 장차(長次)의 구별인 것(예:장수황씨 장파보), 파명이 파조(派祖)의 관직명 또는 호명(號名)인 것(예:순흥안씨 참판공 파보, 안동권씨 별장공 파보)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파보는 단지 한 동족의 1분파만을 수록한다는 수록범위의 차에 의해서만 한 동족전체를 포괄하는 족보와 구별될 뿐 그 내용·형식·분량에 있어서는 양자가 다름이 없다.
마지막으로 한 동족 이상의 동족을 포함하는 국내 족보 전반을 망라한 계보서로는 ≪청구씨보 靑丘氏譜≫·≪잠영보 簪纓譜≫·≪만성대동보 萬姓大同譜≫·≪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조선씨족통보≫는 ≪동국문헌비고≫의 <성씨록 姓氏錄>에 준하여 여러 성씨의 본관과 분파의 연원 등이 기재되어 있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족보를 가진 동족의 세계표를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
족보는 서양에서도 있었다고 하나 동양의 족보와 같은 것이라기보다 대체로 개인의 가계사(家系史)와 같은 것이다. 동양에서 족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족보가 등장하고 있다. 족보의 연원을 살핌에 있어 족보의 편성·간행을 촉진시킨 우리 나라 고유의 사회적 정세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두헌(金斗憲)은 “한국에 있어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현저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계급적 의식과 당파관념이 자못 치열해짐에 따라 문벌의 우열을 명백히 하려고 하였음에 기인한다.”고 말하였다.
족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으로는 ①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③ 적서(嫡庶)의 구분, ④ 친소(親疏)의 구분, ⑤ 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시대의 묘지명 등의 사료에 의하면, 소규모의 필사(筆寫)된 계보는 이미 고려시대 이래로 귀족 사이에 작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으로 이때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 永樂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는 문화 유씨의 두번째 족보인 1562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 嘉靖譜≫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1476년 발간의 ≪안동권씨세보≫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임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조선 초기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 여흥 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成氏, 1493) 등의 족보이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족보는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는데 모든 동족이 같은 시기에 족보를 간행한 것은 아니다. 어떤 종족은 16세기에, 어떤 종족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에 비로소 족보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현재까지도 족보를 간행하지 않은 종족도 적지 않은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동족의 형성이나 조직성은 종족에 따라 시대적으로 차이가 나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동족조직이 형성된 종족도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현상일 수도 있다.
조선 초기에 출현한 족보의 발간경위에 대해서는 ≪남양홍씨세보≫와 문화 유씨의 ≪영락보≫·≪가정보≫, ≪안동권씨세보≫ 등을 통해서 대체로 알 수 있다. 1454년에 발간된 ≪남양홍씨세보≫의 서문에 의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1454년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한 사람은 시조의 16대손인데, 시간(始刊) 전에는 시조부터 9대손까지의 세계를 그린 계보도만 있었다. ② 이 계보도는 수보자(修譜者)의 종당형(從堂兄, 재종형)이 선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보관하고 있었다.
③ 9대손 이후, 즉 10대손부터 16대손까지는 기록이 없어서 9대손이 수보자의 몇 대조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첩이 있어서 이것을 여러 벽에 걸어놓고 여러 날 관찰, 연구해 보니 전체의 세계를 알 수 있었다. ④ 수보(修譜)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의 경우는 고조까지의 기록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밖에 문화 유씨의 ≪영락보≫(1423), 문화 유씨의 ≪가정보≫(1562), ≪안동권씨세보≫(1476), ≪전의 이씨초보 全義李氏草譜≫(1476) 등의 서문을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향을 알 수 있다.
첫째, 족보에는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없이 모두 수록하고 있다. 둘째, 1500년대의 족보나 1400년대의 족보를 보면, 자녀를 연령 순위로 기재하고 있다.
셋째, 1400년대에 족보가 시간된 당시나 그 이전이나 또는 그 이후에 규모가 작은 가첩 또는 사보(私譜)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가첩은 도보(圖譜)일 수도 있으며 역시 내·외손(친손과 외손)이 모두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 가첩이나 사보는 큰 족보 발행의 자료가 되었다. 넷째, 가첩에 실린 자손의 범위는 문화 유씨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외 8촌의 범위 정도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초기 족보의 발간경위와 대체적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족보가 어느 정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발간되었는가를 세기별·문중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5세기에 시간된 족보의 수보간격
문화 유씨:1423, 1562, 1688, 1740, 1803, 1864, 1926
남양 홍씨(당홍파):1454, 1716, 1775, 1834, 1876, 1920
안동 권씨:1476, 1605, 1701, 1734, 1794, 1856
② 16세기에 시간된 족보의 수보간격
한양 조씨:1524, 1651, 1726, 1807, 1849, 1884, 1921
합천 이씨:1529, 1754, 1801, 1876, 1907
강릉 김씨:1505, 1743, 1873, 1903, 1925
영일 정씨:1575, 1649, 1774, 1805, 1880, 1915
능성 구씨:1576, 1635, 1716, 1787, 1853
③ 17세기에 시간된 족보의 수보간격
양성 이씨:1606, 1659, 1773, 1804, 1838, 1878, 1917
청풍 김씨:1638, 1715, 1750, 1857
반남 박씨:1642, 1683, 1706, 1825
한산 이씨:1643, 1740, 1846, 1905, 1937
기계 유씨:1645, 1704, 1738, 1786, 1864, 1912
풍양 조씨:1678, 1731, 1760, 1826, 1900
경주 박씨:1684, 1864, 1883, 1908
경주 김씨:1685, 1784, 1873
인천 이씨:1694, 1777, 1832, 1864, 1876, 1903
④ 18세기에 시간된 족보의 수보간격
달성 서씨:1702, 1815, 1829, 1841, 1881, 1907
대구 서씨:1702, 1736, 1775, 1818, 1852
울산 박씨:1705, 1781, 1819, 1875, 1925
동복 오씨:1712, 1793, 1846, 1866, 1904, 1926
연안 김씨:1719, 1765, 1870, 1912
포산 곽씨:1743, 1782, 1853
순창 설씨:1749, 1786, 1848, 1875, 1912
⑤ 19세기에 시간된 족보의 수보간격
칠원 제씨:1821, 1883, 1925
위의 사실에 의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향을 알 수 있다.
첫째, 18세기나 19세기에 시간본을 낸 동족의 초간(初刊)과 재간의 시간간격은 비교적 짧다. 둘째, 15세기나 16세기에 족보를 시간한 동족은 대체로 긴 시간이 경과한 후에 재간본을 발간하였다.
셋째, 17세기에 족보를 시간한 동족의 초간과 재간과의 거리는 대체로 조선 초기(15세기, 16세기)에 시간본을 낸 종족과 조선 후기(18세기, 19세기)에 시간본을 낸 종족의 초간∼재간 거리의 중간에 있다.
넷째, 15세기나 16세기에 족보를 처음으로 발간한 종족의 초간과 재간의 시간거리가 길다는 것은 아직도 동족집단이 형성되지 않았거나 또는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동족의식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다섯째, 전체적으로 조선 초기보다 중기, 후기로 내려올수록 수보간격이 좁아진다.
여섯째, 초판의 발행이 이르든 늦든 대체로 어느 종족이나 초판∼재판간이나 재수∼3수간의 간격이 길고 수보를 거듭할수록 그 간격이 좁아진다. 일곱째, 시대적 관점을 떠나서 평면적으로 수보의 간격을 살펴보면 수보간격 31∼40년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41∼50년, 51∼60년의 순이다.
어떤 종족이 족보를 발간하였는가를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일제강점기 발행의 족보를 통하여 알아보면, 일제강점기에 족보를 간행한 성(姓)의 종류는 125성에 달한다. 1930년 현재 한국인 성의 총수 250 종에 비하여 약 반수에 해당한다.
같은 기간에 족보를 발간한 횟수별로 동족을 보면 4회 이상 발간한 동족의 수가 가장 많고 5회부터 10회 사이가 그 다음이고, 11회부터 20회 사이가 그 다음이다[표 1].
[표 1] 일제강점기의 족보발간횟수별 동족수
다음에 같은 기간에 족보를 간행한 바 있는 동족의 성과 본관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표 2] 와 같다.
[표 2] 일제강점기의 족보발간 동족
족보의 조직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족보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그 편집은 일정한 원칙과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공통점이 있다. 족보의 내용을 대략 기록의 순서에 따라 구성요소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서(序)와 발(跋)
서는 족보의 권두에 실린 서문이며, 족보일반의 의의, 동족의 연원·내력, 족보편성의 차례 등을 기술한다. 발은 서와 거의 다름이 없는데, 다만 편찬의 경위가 좀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른 동족원일지라도 세상에 이름난 사람에 의하여 쓰여진 것도 있으나, 흔히는 직계후손의 학식 있는 사람 중에서 이를 기술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보·수정하게 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구보(舊譜)의 서와 발을 수록한다. 또한 파보 등의 지보(支譜)에는 종보(宗譜)의 것을 그대로 재록한다.
(2) 기(記) 또는 지(誌)
시조 또는 중시조(中始祖)의 사전(史傳)을 기재한 것으로 현조(顯祖)의 전기·묘지(墓誌)·제문·행장·언행록·연보 등을 기록한다. 또한 시조전설, 득성사적(得姓事績), 향관(鄕貫), 지명의 연혁, 분파의 내력 등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한다. 간혹 그 조상에게 조정에서 내린 조칙이나 서문(書文)이 있으면 명예롭게 이를 수록한 것이 있다.
(3) 도표 시조의 분묘도(墳墓圖)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의 지도, 종사(宗祠)의 약도 등이다. 선조의 화상 같은 것은 별로 없다.
(4) 편수자 명기(名記)
대개는 족보의 편수를 담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어떤 파보에는 거기에 참여한 다른 파의 유사(有司)도 기입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명예를 표창하는 동시에 기록의 정확을 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5) 범례
일반 서적의 범례와 같이 편수기록의 차례를 명시한 것인데 기록의 내용을 아는 데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그 가운데에는 가끔 가규(家規) 또는 가헌(家憲)과 같은 범례 이상의 것이 포함된 것도 있다.
(6) 계보표
족보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으로 전질(全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서문·기·도표·편수자명기·범례 등은 첫째 권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고 나머지 전부는 이 계보표로 이루어져 있다. 기록양식은 조선 초기의 족보를 비롯하여 명청(明淸)의 족보 기록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수록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시조부터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縱系)를 이루고, 그 지면이 끝나면 다음 면으로 옮아간다. 이때 매면마다 표시(예를 들어 천자문의 한 자씩을 차례로 기입)를 하여 대조에 편리하게 한다.
각각의 사람에 대하여는 그 이름·자호·시호·생졸(生卒) 연월일·관직·봉호(封號)·과방(科榜)·훈업(勳業)·덕행·충효·정표(旌表)·문장·저술 등 일체의 신분관계를 기입한다.
특히 이름은 반드시 관명(冠名)을 기입하는데, 그 세계(世系)와 배항(排行)에는 종횡으로 일정한 원칙에 의한다. 자녀에 관하여서는 특히 후계의 유무, 출계(出系) 또는 입양(入養, 親生子는 ‘子00’, 양자는 ‘繼00’라고 적는다), 적서(嫡庶)의 별(서자를 수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음), 남녀의 별(여자는 이름을 적지 않고 사위의 성명을 기입함) 등을 명백히 한다. 또 왕후 또는 부마가 되면 특히 이를 명기한다.
분묘의 표시, 그 소재지, 묘지(墓誌), 비문 등을 표시하고, 특히 시조의 묘지를 선영(先瑩) 또는 선산(先山)이라고 칭한다.
이상에서 대략적인 계보표의 내용을 설명하였는데, 물론 종족 또는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기도 한다. 또한 한 족보에 있어서도 각각의 가족상황을 기입한 단자(單子)의 내용에 따라 내용의 기록이 자세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족보의 일반적인 성격, 즉 개념·종류·명칭·연원·발간·체재 등이 족보가 처음 출현한 조선 초기부터 현재까지 항상 같지는 않았다. 동일한 종족이 간행한 족보라 하더라도 구보와 신보의 기재내용은 많은 점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이다.
특히 족보의 이러한 기재내용의 변화가 동족의식 내지 동족의 조직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때 시대의 변천에 따라 동족자체의 성격이 변화하였음을 말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족보 기재내용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조선 중기 17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변화하였으므로 조선시대에 국한하기로 한다.
동일한 종족의 구보와 신보를 모두 갖추어야 이러한 변화를 명확히 고찰할 수 있으나 그러한 자료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여러 시기에 발간된 족보의 범례를 중요한 자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나온 신보에 구보의 범례가 모두 기재되어 있지는 않다고 하여도 여러 동족의 족보(구보·신보)의 범례를 종합하여 보면, 대체로 한 종족에서 발간한 바 있는 모든 구보·신보의 범례를 알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시기가 좀더 소급되는 시대, 즉 1500년대, 1600년대, 1700년대의 족보도 주요한 자료가 된다.
(1) 수록 자손의 범위 변화
먼저 초기의 족보에 수록된 자손의 범주와 범위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에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즉, 조선 후기로 올수록 이것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알아본다. 초기의 족보는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끝까지 기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안동 권씨·전의 이씨·문화 유씨 등의 족보뿐만 아니라 ≪청풍김씨세보≫(1750)·≪안동김씨을축보≫·≪남원윤씨족보≫(1706)·≪한양조씨파보≫(1917) 등의 범례에 의하면 이들의 구보가 모두 친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문화 유씨의 ≪가정보≫(1562)를 통하여 알아본다. ≪가정보≫의 계보 첫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 유씨의 친손도 사위나 외손과 마찬가지로 성(姓)을 꼭 기재하였다(후기의 족보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둘째, 자녀의 기재순위는 출생순위 즉, 연령순이다. 여자는 언제나 사위의 이름으로 기재한다.
셋째, 문화 유씨의 성을 가진 문화 유씨의 친손뿐만 아니라 문화 유씨의 외손, 외손의 외손, 외손의 외손의 외손……까지 모두 기재하였다. 이렇게 볼 때 문화 유씨의 ≪가정보≫는 친손과 외손을 모두 포함하는 자손보(子孫譜)라 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조선 말기의 족보에는 이성자(異姓者)는 보통 사위만이 기재된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족보가 외손(이성자)을 모두 기재하였다고 한다면, 조선 초기에서 말기로 옴에 따라 외손의 범위가 축소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외손의 범위가 언제부터, 어떻게 축소되었는지를 알아보면 [표 3] 과 같다.
[표 3] 외손의 수록범위 변화
[표3]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경향을 알 수 있다. 어떤 동족(청주 이씨·고성 이씨·진성 이씨·반남 박씨)은 이미 17세기 초에 외손의 범위가 ‘외손 3대’로 축소되었는데 반하여, 그 밖의 동족은 18세기 또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외손 3대’로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동족이 같은 연대에 외손 범위를 축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사된 20개 동족 가운데 14개 동족은 18세기에 들어와서 외손의 범위를 3대 또는 2대로 축소하였다.
요컨대 15세기, 16세기까지는 대체로 외손도 친손과 똑같이 한정하지 않고 모두 기재하다가 17세기에 들어와서 일부는 외손의 범위를 3대로 한정하였고, 18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동족이 외손 3대로 한정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족보를 시간한 동족의 외손 제한 기재는 다음의 어느 한 과정을 밟은 것 같다. 즉,
가. 외손 전부→3대→2대→사위
나. 외손 전부→3대→사위
다. 외손 전부→2대→사위
그러나 조선 중기에 족보를 시간한 동족은 대체로 처음부터 외손 3대와 2대만 기재하다가 사위만 기재하게 되었고(예:1702년 시간의 대구 서씨의 경우), 조선 말기 내지 그 이후에 족보를 시간한 동족은 처음부터 사위만을 기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예:1821년 시간의 칠원 제씨의 경우). 그 이유는 족보의 범례에 나타나 있는 용어를 빌리면, ‘본말(本末)’이나 ‘주객(主客)’ 또는 ‘내외지별(內外之別)’을 밝히기 위함이다.
또는 경제적 이유를 드는 족보도 있지만 이것마저도 동족, 즉 부계친의 의식이 강화되어 외손보다는 친손을 더욱 존중한 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문화 유씨 ≪가정보≫의 예처럼 16세기에는 친손(부계친)도 외손(이성자)과 함께 성을 기록하였는데, 그 뒤 외손은 언제나 성을 기록하는 데 대하여 부계친, 즉 본종은 시조만 성을 기록하는 현상도 본종(부계친)위주 사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같은 자손이라도 동성동본의 자손과 이성의 자손을 구별한 데서 생긴 것이다. 즉, 족보의 범례에 따른다면 외손만 성을 기록하는 것은 본종위주 내지 동성자손과 이성자손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2) 남녀 서열의 변화
조선 초기의 족보에는 아들, 딸(사위)을 출생순위로 기재하였으나, 중기·후기로 내려오면서 아들을 먼저 기재하고 딸(사위)을 나중에 기록하는 선남후녀(先男後女)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남녀 기재순위의 변천은 성의 기록여부나 외손의 범위축소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동족의식과 관계가 있다.
즉, 후기로 내려오면서 본종사상(동족의식)이 강화되었음을 나타내는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족보에서의 남녀의 기재순위의 변화를 도표로 살펴보면 [표 4]와 같다.
[표 4] 족보의 남녀 기재순위 변화
17세기에 벌써 선남후녀의 양식을 따른 동족도 있고(평산 신씨·고성 이씨·문화 유씨), 18세기에도 아직 남녀의 출생순위의 방식을 따른 동족도 있기는 하지만 (반남 박씨·연안 김씨·달성 서씨·용인 이씨·동복 오씨·풍양 조씨·청풍 김씨·남원 윤씨·안동 김씨), 대체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동족이 선남후녀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17세기에는 출생순위가 지배적이고, 18세기에는 출생순위와 선남후녀의 두 가지 방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18세기 후반부터는 선남후녀의 방식이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외손의 범위가 축소된 연대와 출생순위로부터 선남후녀로 남녀의 기재순위가 이행한 연대가 거의 동일하다고 하겠다.
이 선남후녀의 사회적 의미는 동족, 즉 본종을 존중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녀를 연령순으로 기재하는 것은 윤서(倫序), 즉 차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출생순위로부터 선남후녀로 바뀐 현상은 윤서보다 동족질서를 우위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계친에 있어서 선남후녀로 바뀐 시대에도 외손만은 이러한 선남후녀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예:대구서씨세보(1775)·기계유씨족보 (1704)].
(3) 양자와 종가사상(宗家思想)
종가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측면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여기서는 족보에 나타나 있는 양자문제의 측면에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먼저 장남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의 입양문제부터 살펴보자. 즉, 가계계승의 강도(强度), 다시 말하면 입양의 보편성의 문제이다.
하나의 예로 문화 유씨 14개파의 종손의 가계도를 분석해보면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파조(派祖)의 장남계보가 시종일관 계승된 집은 하나도 없다. 때로는 입양에 의하여 장남의 가계계승을 시도하였지만 결국 차남·3남계열로 가계가 계승되었다.
② 조선 초기·중기까지는 차남·3남계열로 파조의 계보가 계승되지만 조선 중기·후기부터는 장남계열의 가계계승이 고정되었다. 이렇게 볼 때 종가의 대가 끊겨서는 아니된다는 생각은 조선 중기 이후에 강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③ 문화 유씨는 시조의 장남계보가 이어지지 않았다(이러한 경향은 다른 동족의 족보에도 나타나는 경향이다).
④ 조선 초기에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의 가계도 차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장남이 동생의 아들을 입양하는 경우의 양부(養父)와 양자의 관계는 어떠한 혈연적 관계가 있는가를 역시 문화 유씨의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표 5] 장남이 조카를 입양하는 경우의 양자 신분
[표5]에 나타나 있듯이, 16세기까지는 형에게 친생자가 없는 경우 동생의 장남이나 독자를 입양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만 동생의 차남·3남을 입양시킨다.
17세기부터는 동생의 장남(독자)을 입양시키는 경우와 동생의 차남·3남을 입양시키는 두 가지 경우가 공존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거의 동생의 장자나 독자를 입양시키는 경향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독자를 형에게 입양시킨 어떤 동생은 다시 다른 근친자를 자기의 양자로 입양시킨 사례도 있었지만, 입양할 수가 없어서 절가(絶家)된 사례도 있었다.
동생의 장자나 독자를 형에게 입양시켰는가 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종가사상의 유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조선 초기에는 종가사상이 거의 없었고, 17세기부터 종가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여 후기에 들어와서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라 하더라도 형제간이라야만 동생의 장자를 형에게 입양시키는 것이지 4촌만 되어도 자기의 장자를 4촌집(큰집)으로 입양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자기의 장남을 큰집인 4촌집으로 입양시킬 정도의 ‘큰집 존중사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형제간에만 이 사상이 농후하였다고 하겠다.
(4) 항렬의 사용
이름의 기준이 되는 항렬자(行列字)의 사용 양식을 보자. 이 방법은 이미 고찰한 족보의 발간이나 외손 범위의 축소, 또는 남녀의 기재순위의 변화에 의한 동족 성격의 파악 이상으로 직접적으로 동족 조직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항렬의 사용 경향을 문화 유씨의 족보를 통하여 알아본 것이 [표 6]이다.
[표 6] 항렬자의 사용범위
문화 유씨의 시조(1세)로부터 7세까지는 독자로 나타나 있으므로 8세부터 30세까지의 자손의 항렬자 사용 여부를 나타낸 것이다(0표는 그 범위에서 항렬자를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 동족원이 그 범위에서 항렬자를 사용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표6]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경향을 알 수 있다. ① 대략 고려 말기부터 형제간에 항렬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② 이때 이후 시대가 지남에 따라 항렬자를 쓰는 범위는 점차로 4촌, 6촌, 8촌……등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조선 후기인 1864년(고종 1)에는 31세부터 적용되는 문화 유씨 전체의 대동항렬자를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③ 가족적인 항렬이 동족적인 항렬로 확대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왜냐하면 가족보다 더 큰 동족의 최소의 범위를 8촌이라 한다면 대체로 8촌간에 같은 항렬자를 사용한 시기는 17세기에 들어와서이기 때문이다.
형제나 4촌간에만 항렬자를 사용하던 시기에 8촌 이상의 넓은 범위의 항렬자를 사용한 사례가 하나도 없는 것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고 하겠다.
④ 특히 어떤 넓은 범위에서 항렬자가 사용된다는 것은 바로 그 범위가 집단의 조직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직성과 통제성이 없으면 같은 항렬자가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17세기에 들어와서야 가족보다 넓은 하나의 부계 혈연집단으로서 8촌까지의 집단이 조직과 기능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령 17세기에 들어와서 8촌 범위의 항렬자가 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문화 유씨의 모든 성원이 각각 그러한 범위의 항렬자를 제정,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대의 항렬 제정의 범위가 8촌일 뿐이고 그 밖의 더 많은 사람들은 각각 형제, 4촌, 6촌 범위의 항렬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통의 항렬자를 사용하는 동족결합의 범위는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대되어 19세기에 이르러 동성동본이라는 최대의 집단으로 확대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항렬자를 보고 동족(동성동본)과 파(派)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이고 그 이전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항렬자 사용의 범위 확대라는 시대적 변화는 앞서 살펴본 외손범위의 축소, 남녀의 기재순위, 장남의 양자신분 등의 시대적 변화와 상응하고 있다.
끝으로 문화 유씨 이외의 동족의 대동항렬이 결정된 연대를 보면, 18세기에도 있으나 대체로 19세기에 들어와서이며 20세기에 와서 항렬자를 제정한 동족도 있다.
연안 김씨(1870)·남원 윤씨(1860)·남양 홍씨(1834)·용인 이씨(1773)·능성 구씨(1853)·남원 양씨(1916) 등에서 이러한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실제로 항렬의 결정에서는 대체로 오행의 원리에 따랐다.
이상과 같이 족보의 개념·종류·명칭·연원·발간·체재 등 일반적인 성격과 조선시대의 족보를 통해서 본 동족조직의 변화, 즉 족보에의 수록자손의 범위(외손의 범위), 남녀의 기재순위, 양자사례를 통하여 본 종가사상, 그리고 항렬자의 사용과 동족조직 등을 고찰하였다. 족보의 시간(始刊)이 곧 동족(씨족)의 성립 내지 발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8촌이 동족의 최소의 단위라 한다면 통제성과 조직성을 가진 동족의 출현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친손과 외손을 동등시하는 자손보의 성격을 가진 초기의 족보가 동족사상의 형성·강화로 말미암아 외손 범위의 축소, 자녀의 연령순 기재에서 선남후녀 순위에의 전환, 양자에 있어서 종가사상의 대두, 항렬자 사용범위의 확대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후기에는 사위가 처가에 머무르는 기간이 아주 단축된 시기여서 외손을 무시하여 외손봉사(外孫奉祀)를 이단시하게 되었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사위와 딸이 아들과 같은 집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였다고 생각되며 적어도 16세기까지의 족보에 외손도 무간하게 기재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외손 범위의 축소는 사위가 처가에 머무르는 기간이 상당히 단축된 시기라고 보여진다.
이와 더불어 선남후녀의 서열사상, 장남에게 더 많은 재산을 상속하는 사회적 환경, 제사를 장자에게만 한정·고정시키는 사회적 상황, 대동항렬의 제정 등으로 조선 후기의 동족은 집단성과 통제성을 지닌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조선 중기 이전에 종회(宗會)나 종족(宗族)이라는 용어가 각종 기록에 보이나 이것을 곧 조선 후기와 같은 내용의 부계 혈연집단이라고 보아서는 아니된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기록이고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사문서이지만 공문서의 성격도 지닌다. 족보의 기록을 통하여 자기 조상의 업적을 배우고 종중(宗中)의 협동과 상부상조, 그리고 교화의 구실을 하는 면에서는 단순한 가계기록 이상의 사회통합적 순기능도 지닌다.
나아가서 가령 동성불혼의 관습에 따른 판단자료가 되기도 하는 법률적 효용성이라든가, 여러 종중의 족보기록을 통하여 우리 나라 전통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규명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과거의 조상을 미화시킨다든지, 없는 조상을 일부러 만들어 넣는 등 위보(僞譜)를 만드는 일도 있어 그 폐해도 더러 있다.
더욱이 전통사회에서 부역을 면하기 위하여 다른 집안의 족보에 이름을 얹는 부보(附譜)가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이 종종 있다. 어떻든 족보가 단순히 가계의 기록만이 아니라 종중의 단합과 사회적 통합의 기능을 지닌다고 할 때 그것은 오늘날에도 존재의의가 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의 출판물 중 족보발간이 가장 성행하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 족보는 부계중심의 기록이라든가, 현대적인 미감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 거론되는 가운데 최근에는 한글로 풀어쓴 것이라든가, 영상자료 형태의 족보도 등장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민족원류(民族源流)』
『제성보(諸姓譜)』
『성원총록(姓苑叢錄)』
『백씨통보(百氏通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동국씨족보(東國氏族譜)』
『조선가족제도연구』(김두헌, 을유문화사, 1949)
『한국가족제도사』(최재석, 일지사, 1983)
『조선사회사연구』(송준호, 일조각, 198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국민백과사전
그리고 또 ~ 자료는
족보다른 표기 언어
族譜
문의 요약 족보제도의 확립은 조선시대 유교통치이념의 정립으로 이루어졌다. 종족은 대개 대종과 소종으로 나뉘는데 본관과 성을 그 표지로 한다.
한국의 성은 부계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인데 같은 성이 모두 같은 혈통은 아니기 때문에 본을 정하게 되었다. 동성동본의 씨족들은 각기 파를 갖게 된다.
족보의 종류는 본관 소속의 동족 전부를 망라한 종보와 자기의 파만을 위주로 기재한 것을 파보, 자기의 직계만을 적은 가첩이 있다.
족보의 제작은 문중에서 관리하며 대개 30년 주기로 작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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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系譜)·보첩(譜牒)·세보(世譜)·세지(世誌)·가승·가첩·성보(姓譜)라고도 한다.
족보제도의 확립은 조선시대 유교통치이념의 정립과 더불어 진척되었다. 족보는 문중제(門中制)의 정착을 의미한다. 대개 종족(宗族)을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나누었을 때, 문중은 당내(堂內)의 확산형인 대종에 속하며, 이것은 남계혈통(男系血統)의 전체를 가리키며 본관과 성을 그 표지로 한다.
여기서 대종을 문제 삼을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성(姓)과 본(本)이다. 한국의 성은 남계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누구든지 일단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성은 반드시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다. 노비나 승려같이 이름은 있으되 성이 없는 경우도 있었고, 자기 신분을 피하기 위하여, 또는 임금이 따로 성을 하사하여 획득하는 경우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하여 성은 가변성을 지닌다. 이같은 창성(創姓)과 개성으로 인하여 이미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1454)에는 265성,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에는 497성에 이르렀다.
이렇듯 성의 변화로 말미암아 같은 성이라 하여 반드시 남계 혈통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본을 정하게 된 것이다. 본은 남계혈통 시조의 발상지 또는 장기간의 거주지를 표시하고, 이는 곧 남계혈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동성동본은 씨족(氏族)을 의미한다. 원래 본은 본관(本貫)·본적(本籍)·향관(鄕貫) 등으로도 부른다. 동성동본의 씨족들은 각기 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파의 숫자도 씨족마다 다르다. 이러한 후손의 계보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일정한 기록문서가 필요하여 족보의 발달과 완성을 가져온 것으로 파악된다.
더욱이 가부장적 유교사회의 확립과 더불어 가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족보사업이 과도하게 진척된 폐습도 생겨났다.
족보의 종류는 다양하다. 첫째, 본관 소속의 동족 전부를 망라한 종보(宗譜)가 있다. 이를 그 조상의 순으로 적고 파(派)를 구분해서 파별로 기재했으므로 세보 또는 대동보(大同譜)라고 부르며 대개 1권으로 만든다. 둘째, 조상의 계통 이외에 자기의 파만을 위주로 기재한 것을 파보(派譜) 또는 지보(支譜)라 부른다.
여기에는 동종(同宗)을 전부 망라한 것이 아니다. 한 씨족에서 갈린 각 파의 계통록으로 자손이 번성한 경우에는 여러 권이 되기도 하는데, 보통 족보라 할 때 대개 이 파보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 자기의 직계만을 적은 가첩이 있고 자기 직계의 행적·사적을 적은 가승이 있다. 그래서 김해김씨 세보, 신안주씨 세보, 전주이씨 효녕대군파 등의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전국의 성씨별로 시조·중시조 또는 유명인사를 망라해 적은 것으로 〈만성대동보 萬姓大同譜〉·〈청구씨보 靑丘氏譜〉·〈잠영보 簪纓譜〉 등이 있는데, 전국의 성씨 개략을 정리해 놓았다. 이중에서 가장 잘 구비된 것은 〈청구씨보〉로 대동보를 증보하여 만든 것이다. 또 조선의 왕실 성씨인 전주이씨의 여러 계보를 적은 것으로는 〈선원보 璿源譜〉라고 이름을 붙여 다른 족보와 구분했다. 이 선원보에는 각 왕자와 군(君 : 후궁에서 태어난 왕자를 군으로 구분)을 표시하여 계통을 상세히 밝혔다.
특수한 족보로는 내시들의 계손(系孫)을 밝힌 〈양계세보 養系世譜〉가 있다.
내시들은 원래 자식을 둘 수 없어서 양자를 맞아 계통을 이었는데 이것을 밝혀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당색(黨色)을 구분하여 중요 인물의 자손을 적은 〈남보 南譜〉·〈북보 北譜〉 등이 있는데 이는 족보에 토대를 둔 것이기는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족보라고는 할 수 없다. 그외에도 뛰어난 현인(賢人)들을 표기한 보서(譜書)로 〈문보 文譜〉·〈삼반십세보 三班十世譜〉·〈호보 號譜〉·〈진신오세보 縉紳五世譜〉가 있다.
자기 조상 중에서 충효절의(忠孝節義)를 수록한 것으로는 〈대방세가언행록 帶方世家言行錄〉·〈보성선씨오세충의록 寶城宣氏五世忠義錄〉 등이 있다.
족보의 제작은 문중에서 관리한다. 족보는 대개 30년 또는 불가피할 경우에 50여 년을 주기로 작성된다. 이는 한 세대를 잡아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편찬순서는 우선 종회에서 간행을 결의하면 따로 편수위원회를 조직하고 여기에서 각 파에 작보(作譜)의 사실을 통지하면 각 파에서는 그 자손들에게 이를 알린다.
그리하여 시조로부터 대수(代數)에 따라 파별로 갑·을·병으로 나누어 기재하고 같은 대수일 경우 항렬 순서대로 적는다. 대개 도식처럼 기재하고 있다. 시조로부터 한 세대에 한 칸씩 아래로 내려 쓰며, 동항렬(同行列)은 같은 난에 쓴다. 내용은 명(名)·자(字)·호(號)를 쓰고 생졸(生卒)의 왕조간지월일(王朝干支月日)을 쓴다. 예전에는 유명한 인물일 경우 상례(常例)의 내용 이외에 그 행적을 추가하기도 했다. 벼슬아치나 유명한 학자 및 효자 등을 중심으로 적기도 했다. 요즈음에는 직위나 학력 등을 기재하기도 한다.
족보를 관리하는 기구로는 화수회(花樹會)·종친회(宗親會)·종약회(宗約會) 등이 있다.
이것도 본관별 또는 파별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런 종친을 관리하는 곳에서 족보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거나 또는 시기가 되면 편찬위로서 대동보소(大同譜所) 또는 파보소(派譜所)라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고 실무책임자로 유사(有司)를 둔다. 유사는 일족에게 단자(單子)를 보내라는 공고 또는 서신을 띄운다. 단자는 계파에 쓰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은 물론 본인의 나이, 이름, 배필의 성씨, 자식의 나이와 이름, 사위의 이름과 사위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본인 아버지의 이름, 본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기일(忌日) 및 묘에 관계되는 내용을 적는 것이다.
또 할당된 경비도 함께 보내야 한다. 이 단자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수단(收單)이라 부른다. 이들 족보는 철저하게 부계사회의 가부장적 문화를 반영한다. 배우자에 관한 사실은 약간 기재하지만 모계에 대해서는 그 계통을 따져볼 수 없다. 따라서 딸의 이름을 쓰지 않고 사위의 이름으로 대신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같은 혈통이면서 딸은 아들보다 격을 낮추어 취급하는 것으로 남존여비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계통을 밝히면서 가통의 정통을 명시하게 되어 있어 적서를 구분했다. 첩제도를 인정하면서도 첩의 내력은 쓰지 않고 서자임을 밝히는 모순을 보여준다.
이들 족보의 기원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족보로는 명나라의 〈가정각본 嘉靖刻本〉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이는 조선 초기에 한국의 족보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재 전해오는 족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문헌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성종 때인 1470년에 이루어진 안동권씨 족보이다.
서거정이 쓴 서문에서 "우리나라에는 종법(宗法)과 보첩이 없고 거가대족(巨家大族)은 있으나 가승은 없다"라고 했으니 조선 초기에는 완비된 족보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연려실기술〉 별집에 따르면 1522~23년에 이루어진 문화유씨 족보인 〈문화유보 文化柳譜〉가 최초의 것이라고 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안동권씨 족보를 〈성화보 成化譜〉라고 하고 문화유씨 족보를 〈가정보 嘉靖譜〉라 부르기도 한다.
간행이 활발해진 시기를 16세기 중엽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후 족보는 본관 위주로 많이 만들어졌다. 〈증보문헌비고〉에 이씨의 본관은 365본, 김씨의 본관은 520본이라고 나타나 있어 각 씨족 중심의 족보 숫자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족보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족보는 조상의 계보를 밝히고 후손들 상호간의 관계를 알려준다는 좋은 측면도 있으나, 지나치게 문벌을 중시하고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악습도 있다. 차츰 족보 서술에도 변화가 이루어져서 가부장적인 입장을 떠나 여자들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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