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에 대한 고덕이야기
주영길 <고덕면종합정비사업 추진위원회 사무국장>
충청도 내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84~85년 신암 여사울 출신 이존창(루도비꼬)에 의해서였다.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포지역은 조선에서 가장 많은 교우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는 천주교는 가장 왕성한 선교지였던 내포를 위해 1890년 본당을 설립한다.
고덕 양촌 본당이다. 삽교천 고덕 구만포를 통해 프랑스 신부가 들어온다.
1890년 양촌 본당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퀴를리에 신부는 한옥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박해로 와해된 공동체 재건에 나선다. 이후 1899년에 보다 견고한 선교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합덕으로 본당을 이전한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고덕면 높은 뫼(몽곡리)를 중심으로 사방 20여 리 지역들은 내포지역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수난 현장임을 아는 이가 드물다.
높은뫼, 황무실(호음리), 별암미(대천3구)를 삼각점으로, 중심으로, 그 안으로 압축해 놓은 듯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순교가 담겨 있는 지역이다.
높은뫼, 황무실, 별암미…
몇년 전 프란시스코 교황의 선언을 통해 한국 순교복자 124위가 새롭게 탄생하였다. 광화문광장에서 복자위에 오른 분들 중에 몽곡리 출신 이시임(안나)과 김종한(안드레아) 두 분의 삶이 고덕 높은뫼의 함평 이씨 집성촌과 관계가 매우 특별하다.
이시임은 을해박해 때 3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옥사한 몽곡리 이유진은 큰 오빠이고 이유정(요한)은 남동생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종한은 이시임이 옥살이를 할 때 그녀의 신앙심을 격려하고 이끌던 사람이다.
이시임의 아버지 이회운과 가까운 사이였다. 몽곡리에 함께 세거해 온 함평 이씨 함성군파 대흥공계의 한집안 형제지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덕, 면천 사람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던 신유박해 전후 시기에 이유정은 몽곡리에 살면서 천주교 수난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유정은 경기도 안성면 미리내로 이주한다. 피난지 미리내에서 이유정의 차남인 이동서와 김 막달레나 부부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니 그가 바로 이민식이다.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천주교 신자가 되어 수난을 당했던 원시장, 방 프란치스코, 정상필등의 순교 행적을 살펴보면 초기 신앙 공동체 성립 시기에 고덕 몽곡리 주변이 그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함평 이씨 장손집인 이유종도 이 시기에 형제들과 천주교를 받아 들였다. 이민식의 할아버지 이유종, 아버지 이동서의 대를 이은 이민식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자신의 선산에 모시는 등 순교 사제 묘소로 제공하고 길 안내를 선도하였다.
병인박해 때 오메르트 신부의 복사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어 있던 신리와 거더리(상궁3구)까지 신부를 모시고 가서 신부 일행의 치명 대열에 동참하였다.
이민식은 1900년에 있었던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시 일본 나가사키에 체류하면서 다불뤼 주교 등 조선에서 모셔온 갈매못 순교자들의 유해 운구를 친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민식이 예산 함평 이씨 미리내 문중의 장손으로 문중 선산 안에다가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시신을 안장하고 교회에 자기 임야(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산 108-1) 등 4만평이 넘는 임야와 전답 등 전 재산을 봉헌했다.
평생동안 이민식은 베르뇌 주교, 다블리 주교두 분, 성 오메르트,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볼리외,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등 6명의 신부와
6명의 신도인 성 정의배 마르코, 성 남종삼 승지, 성 최형, 성 손자선 토마스,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 등 총 14명의 신앙 행적과 치명 사실을 증언하였다(1900년 이원명 원선시오 증언 중에서).
이민식은 92세로 사망할 때까지 동정을 지키며 수도승 같은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후 완덕을 향했던 그의 삶이 미리내 본당 교우들로부터 칭송받고 추모되면서 이민식의 행적은 신자들의 귀감이 되고 천주교회사의 큰 인물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결국 이민식의 집안이 2014년 8월 16일 광화문광장에서 시복된 복녀 이시임 3남매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고덕면 높은뫼에서 함께 살았던 함평 이씨와도 한 신앙 혈족임을 알게 되었다. (자료 제공: 몽곡리 이미란)
공세리성당의 뿌리 양촌성당
또한 고덕면 대천3구 별암미는 천주교 복자위에 오른 124위 중에서 복자 4위의 탄생지이다.
별암미는 홍필주 빌립보(홍지영의 자)의 생장지였고 강완숙 콜롬바의 시댁인 홍지영의 본가가 있던 곳이며 강완숙 가족이 천주교를 처음 만나 입교한 곳이다.
아울러 고덕 높은뫼 출신인 이시임 안나, 면천 출신인 김종한 안드레아 등과 함께 순교한 형제 고성운 요셉, 고성대 베드로의 거주지인 역사의 땅이다.
이시임의 아들과 이름이 같은 박종악이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던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보낸 편지에 예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기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신자 구성, 천주교 탄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으로 활동했던 강완숙과 아들 홍필주의 적극적인 신앙 생활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16년 관덕정에서 순교 당한 최성열(발바라)도 대천리 한내장벌 사람이었다.
또한 황무실(고덕면 호음리)은 순교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송 안토니오 등 수많은 신자들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다. 메스트르 신부는 황무실 공소에서 순종하였다.
일찍이 중국인 주문모 야곱보 신부가 황무실을 다녀간 이후에도 선교사 메스트르, 랑드르 신부가 사목 중심지로 복음을 전하다가 선종하여 안장된 천주교의 교우촌이었다.
이처럼 고덕면의 높은뫼, 별암미, 황무실은 한국천주교회 초기 신앙 공동체의 숨결을 간직한 땅,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지를 이룬 역사의 땅, 천주교의 성지이다.
성지 안내판도 없는
이후 1890년(고종27) 충청지역 최초로 고덕에 양촌본당을 퀴를리에 신부가 설립한다. 양촌성당이 1895년 한국천주교 성당 중 가장 아름답다는 아산 공세리 성당을 분당해준다.
고덕 양촌성당이 1899년 합덕성당으로 해체 이전되면서 합덕성당이 1928년 예산성당, 1939년 당진성당 등을 차례로 분당시켜 주면서 충청도 지역의 천주교 정착과 성장의 기틀을 다지는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고덕 양촌성당이 합덕성당으로 이어지면서 현 대전교구 127개 본당의 모체임을 아는 이가 매우 드물다. 교회 발전사적 측면에서 보면 고덕 양촌성당이 내포지역 교회 발전사의 한 획을 긋게 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황무실, 높은 뫼, 별암미, 양촌마을 등 고덕면 전체가 초기 천주교의 박해 수난 역사 현장이고 수많은 천주교 순교 성인 복자들의 신앙 행적이 가득한 곳이건만 깊이 있는 연구가 절대 부족하고 지역민들의 관심도 높지 않다.
바로 이웃인 당진의 신리 교우촌은 천주교 성지로 수십 만의 신자들이 다녀가건만 예산의 성지는 설명하는 안내판조차 없을 정도로 홀대를 받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치솟는다.
고덕 지역도 작지만 위대한 신암의 여사울 성지와 신리 성지처럼 성역화하면 안되나 과연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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