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族譜史 고찰
■ 우리 함평이씨 족보
언彦자 할아버지를 始祖로 한 우리 함평이씨 족보는 1633년(조선조 인조 11년)에 시조의 17세손이며 함성군의 6세손 득원(得元)의 장남인 澐祖(운조)께서 주관하여 처음 발간하였으며 1663년에 두 번째 초보가 발간되어 함평이씨의 족보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서문만 남아 전해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각 성씨의 대동보 발간이 보편화 된 것이 숙종(1673~1719년)초기라고 하면 다른 성씨에 비하여 40여년이나 앞선 일로써 선조들의 혈통을 실증(實證)하고 숭조 돈목의 정신을 함양하여 씨족의 번영을 기하고자하는 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며 10대 거성(巨姓)의 반열에 자리를 굳히게 된 것입니다.
1, 2차에 걸친 초보를 바탕으로 비로소 완전한 족보의 형태를 갖춘 최초의 대동보인 무진보(戊辰譜)가 1688년 발간되어 10번째로 2014년 갑오보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선조님들께서는 교통과 통신의 어려움 속에서 전국 각지에 산재된 일가들을 한 권의 책에 수록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 노력의 흔적과 그 시대의 상황, 족보 발간 의미 등을 함축적으로 족보 서문에 기록하고 있으므로 우리 후손들은 서문을 통해서 선조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그 업적을 되새겼으면 하는 의미에서 서문을 게재합니다.
원문은 갑오 대동보 1권에 모두 게재되어 있으니 참조하시고 이해하기 쉽게 한글로 해석한 내용을 게재하니 다소 상이한 해석이 있더라도 이해하시고 바로잡을 수 있도록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계유 초보서 癸酉 初譜序 一
함풍족보는 함풍이씨 씨족의 세계(世界)와 사적事跡을 기록한 책이다. 세대가 오래 되고 후손들이 점점 멀어져 그 대수를 알지 못하면 친애의 도가 없어짐으로 시조로부터 후손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자상히 하고 휘자諱字(이름)와 관직과 묘소와 嫡庶(적자와 서자)를 기록하고 혹은 주소를 표시함은 종족이 모두 보고 알아서 멀고 가까움이 없이 서로 친족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 족보를 만드는 의의가 있다.
옛날에 우리선조는 왕실을 섬겨왔고 좋은 징조가 나타나 대대로 장군과 재상이 배출되었으며 오래도록 자손이 지속으로 이어오고 가세가 무궁히 빛나 일찍이 문무관의 벼슬에 봉해지는 것은 조상들의 쌓아 오신으로 그 경사스러움이 반드시 후손들에게 미칠 것이다.
이 족보가 없으면 어찌 우리 조상의 기원을 소상히 알 것이며 조상을 숭상하고 후손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先世때 족보를 종가에 간직하여 영구히 보전할 것을 기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기록이 거의 다 없어졌다.
다행히 면양(지금의 당진 청양지방)에서 전해왔고 또 일가인 석성(부여군 석성면) 경정 씨에게 들어 기록하였으며 수년간을 여러 방면으로 탐문하여 후세 자손들을 기록하여 후손에 전하기 위한 족보를 편집코자 하였으나 정확치가 않았다.
지지난해 신미년(1631년)에 전남 나주에 가니 나주는 함평이 가까워서 우리 종친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알았으며 종친이신 종우 씨께서 조선중종 1506년 부터1521년까지 기록한 종친관련 내용을 지완종친 집에서 구하였다.
선조 참의공(9世孫 자보) 이상의 년보가 대체적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으나 방친(傍親)과 후손의 기록이 미비된 것은 홍무 30년 회진(나주) 참의공댁의 실화 때문이었다.
그 후 호암 유희 씨가 이에 유의하여 상, 하 두 편을 기술하면서 선세의 유지, 교서와 계문, 묘지를 말단에 첨부하였는데 구본은 잊어버리고 유고만이 있으나 자획이 파손되어 전문이 되지 못하여 삭제되고 다만 그 내외자손만을 기록하여 족보를 만들었고 또 동족의 내력을 아는 派는 말단에 별도로 기재하여 일부책자를 만들어 宗家에 비치하고 각 종친들에게 나주어주었다.
오호라. 책을 펼쳐 볼 적에 그 속에 대대손손이 자세히 밝혀지고 이름을 지음에 있어 선조이름을 범하지 않고 친의(親誼)로 종친이 화목한다면 이 족보를 만든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서기 1633년 인조 11년 계유년 후예 운(澐) 근서
● 계묘 초보서 癸卯 初譜 序 二
무릇 물이 한 근원으로서 여러 갈래로 흐르게 되고 나무가 한 뿌리에서 여러 가지가 생기는 것은 만물의 이치이다.
사람도 또한 같으니 우리에게는 할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어 손자가 있는지라 손자의 아들이 증손이 되고 증손의 아들이 현손이 되고 현손의 후손은 먼 후손이라 칭하여 누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간에 형제의 후손은 같은 성의 친족이요 자매의 후손은 다른 성씨의 친족이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3년이 지나게 되면 친부의 정이 소홀해지고 친부의 정이 소원해 지면 나중에는 남과 같아진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학자들에서 이를 두려워하여 시조할아버지가 언제 태어나시고 二世 三世로 수십 代에 이르도록 멀고 가까운 일가와 관직과 훈작을 받은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여 한 권의 책자로 만든 것을 족보라 한다.
나중에 자손들이 족보를 보면 분명히 우리 할아버지가 몇 대 조(代祖)가 되고 우리 친척이 몇 代 친인척이 되며 또한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숙부와 조카의 지파를 각각 서열을 찾아 빠짐없이 수록하였으니 족보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우리 함평이씨는 백제인으로 소재지를 함평에 두었는데 남방에 거주하는 자가 혹 함풍으로 성관을 한 자가 있으니 이는 보첩(譜牒)이 고루 미치지 못한 탓이리라.
시조 이상으로 고려시대 벼슬을 하신분이 어찌 12人뿐이리오 마는 시조 휘 彦 신무위대장군과 휘 和 신호위대장군과 휘 尙文 신호위대장군 외에 알려진 이가 없어서 가승이 傳하지 못하였으니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조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위대하여 휘 克明(10世)병조판서 咸平君과 휘 從生(극명의 子, 11世) 세조때 적개공신 한성부좌윤 함성군 시호 장양공과 휘 량(良 종생의 子, 12世)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함천군이 계셔서 그 자손이 서울과 청양(충남), 덕산(예산군,) 면천(당진군)에 산재하여 그 수가 수백여 세대에 이르고 그 후예로 문관과 무관 음직, 생진사 등이 배출되어 계속이어 지니 세상에 명망 있는 집안이라 칭하는 것은 실로 이에 연유한 것이다.
옛적에 최부(崔溥)라는 사람이 장양공 묘문을 지으면서 그 덕을 많이 쌓고 공훈이 많은 집안이라 찬양하였고 영의정 청백리인 고상이라는 구치관이 비범 제상이라 칭하고 근세 김상공 육堉이 동국명신록을 편찬할 때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서 유명한 장군 6人(고구려 을지문덕, 백제흑치상지, 신라 김유신, 고려 강감찬, 조선 이종생, 이순신)을 기재하면서 유응부(사육신 중 1인)를 첫 번째 장군으로 하고 장양공으로 두번째 장군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에 명망이 있고 후세에 추앙받았음을 가히 알리로다.
시경에 오경을 앎으로 마음이 인후하여지는 모양(의이자손진진宜爾子孫振進)이란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로 함성군의 6대손인 종제 표(滮)가 이 족보를 함성군 6대손 제원의 子인 함릉군 해(澥)씨 집에서 구하여 베끼면서 나에게 머리말을 써 달라 청하니 그 뜻이 또한 갸륵하다.
사람의 생태가 “물이 맨 처음 한 곳에서 흘러나오고 나무는 한 뿌리에서 나온다(水一原木同根)”는 의미는 우리 함평이씨 또한 같은 생각으로 이 족보를 볼 것 같으면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에 돈독한 마음이 자연히 펼쳐 날 것이다.
1663년 숭정계묘崇禎癸卯 17代孫 태원침랑 자 근서 泰園寢郞 滋
1. 1688년 戊辰譜 무진보
1688년 휘 적길迪吉(18世, 함성군)이 주관하여 자滋씨 운澐씨의 양종 문첩기에 각파의 초단을 수합하고 서울과 시골에 있는 여러 일가들에게 미진한 부분을 보완할 것을 통보하여 전보 全譜를 편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귀중한 판목 板木에 새긴 것을 금강산 유점사에 보관하여 영구히 보전할 것을 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발간된 무진보인데 원본이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 살고 있던 재춘 종친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복사하여 복사 분을 대종회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 무진보 서 戊辰譜 序
함평이씨가 백제 때부터 본적을 함평으로 하였으나 여러 번 전쟁을 겪어 족보가 전해 오지 못하였으니 태원침랑 자滋씨(함성군 7세손)의 구초보서에 이른바 시조 이후 당상관이상 벼슬이 어찌 12인 뿐이겠는가 하는 말이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시조이하에 대수의 증감도 있고 세계의 차례도 사라져 종친들이 소장한 가승첩(한 집안에서 만든 족보)이 여의치 않아 의심스러운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으나 보고 들은 것이 부족하여 그렇지 못하였다.
다행히 자滋씨 운澐(함성군 7세손)씨 두 문중어르신께서 작성하신 기록물에 선조 휘 자보 自寶公(시조 9세손) 이상의 족보가 자세하고 호구등본(호적등본)이나 부인의 성관姓貫과 사조四祖를 세세로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본종세계는 반드시 그릇되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늘이고 줄이고 순서대로 되지 않은 것을 거의 바로 잡았으나 그 기록된 족파族派가 소홀한 점이 많으므로 한양도성 사람에게 통고하여 각파 문중이 수단을 수합하여 나의 비통한 마음을 헤아려 전보를 편집하기 바란다.
본인이 마침 고성군수로 있을 때라 고성은 관동 제일 명산이여서 불이 잘나지 않는 곳이라 판각을 다 마쳐 금강사 유점사에 장치하여 영구히 보전할 것을 도모하였다.
금번 편집이 아주 적은 분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각 종친들이 소장하고 있는 가승보 등에 비하면 자못 자상한 편이니 나중에 족보를 계수할 사람이 이를 참고하여 잘못된 곳을 정정하고 빠진 곳을 보충하면 거의 많은 도움이 있으리라.
서기 1688년 崇禎 後 戊辰 八월 下澣 後裔 迪吉 謹錄
2. 1742년 壬戌譜 임술보
임술보는 네 번째 발간된 족보로 당시 사간원 사간과 지제교였던 휘 윤신(潤身, 함성군 10세손, 시조 20세손)이 주관하여 경향 종친들이 합심협력하여 발간하는데 힘썼고 종인들 중에서 휘 태연(泰演 참판공파)과 휘 세식(世植, 운봉공파 후손)이 천리여식旅食하며 분주하게 노력하여 큰일을 담당하여 수년만에 완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이때에 호남 종친들이 제기한 시조 이하 4분의 선조께서 같은 시대의 분이라는 등 많은 문제들이 재기 되었으나 깊이 있게 논의하고 검토한 결과 고려 중세의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서나 비문이나 각 문중 가정에 믿을 만한 문서로 증거가 되지 못하였고 지난 구보와 무진보를 편찬한 문중 어르신들의 정성을 다한 노력을 믿고 바로 쓰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임술보 서 壬戌譜 序
함평이씨의 족보가 신무위대장군 부군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혹 전하기를 대장군 부군 이상에 관가에 출입하는 관리가 있다하나 이름이 전해오지 아니하니 이를 미뤄 연구하면 함평이씨가 동방의 현명한 씨족이 된지가 몇 代인지를 모르나 애석하게도 문헌의 고증이 없어 앞일이 아득하고 막연하여 시초시조를 알 수 없다.
막연하여 고증할 수 없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나 더욱 한이 되는 것은 上祖以下에 또한 한두 가지 의심스러운 일이 없지 아니한 점이라.
구보에 우리 시조가 고려 광종때 사람이라 하였으니 광종은 고려 4대왕으로 중국년표로 하면 송 태조(960년) 때가 되고 또 상조의 현손 상의동정부군(휘 5世 임) 호구를 조사하여 살펴보면 년대가 송의 쇠퇴할 때가 되니 송의 200여년의 사이에 함평이씨가 전해오는 것은 5代에불과하니 가히 의심스러운 일이요 호남문서 중에는 검교홍위위대장군 貴로 증직이 시조에 있었다하여 시조이하 3代系次가 분명하니 광종때 사람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운 일이다.
부원군 휘 광봉(光逢 시조 5世祖)이 구보에 파계가 분명하지 않아 별도로 기재하였으니 이는 실로 심신전의(審愼傳疑 언행을 조심하고 삼감)에 뜻을 둔 것이다.
금번 수단시에 시조이하 네 분의 선조께서 같은 시대 분이라는 말이 호남지방에 거주하는 종친들로부터 나왔으나 기록한 문서가 인쇄본이나 비문이 문중의 공신력이 있는 문서가 아니므로 감히 증거로 하여 바로 쓰지 못한 것은 고려 중세의 사실을 자세히 판단할 수 없으니 한탄할 일이로다.
구보가 무진년에 이루어졌으니 55년 동안 족보를 하지 못하였다.
그 때 종중의 일을 맡은 이가 성실하고 부지런하지 아니하였으리요 마는 자세한 사항이 없고 계파의 질서가 분명하지 않아 종인들이 족보를 편찬하는데 뜻을 두지 못하였다.
이제 전국의 종친들이 힘을 합하여 책을 편찬하는 재주가 없는 본인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고 종친 태연(泰連 참판공 9代孫)씨와 세식(世植 운봉공 14대손)씨가 천리길을 다니며 먹고 자고 길을 잃고 헤매는 분주한 노력과 고생으로 다행히 편찬하였다.
고증을 찾고 밝혀진 곳과 크고 작은 목차는 범례에 상세히 기록하였으니 보는 자가 알 수 있을 것이고 구보에 빠진 사람을 기록하고 틀린 사람을 고치고 바로 잡으며 의심나는 데는 주석을 달고 잘못된 사람은 수정을 본인이 적극적으로 다하였지만 어찌 차이가 없다 하리오.
한 조상에서 여러 파로 나눠지고 한 뿌리에서 천 가지로 나눠진다는 사실을 사람이 어찌 알지 못 하겠는가 마는 세대가 멀어지고 각 지파가 잘 만나지 못함으로 인하여 같은 조상임에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 가족을 함께 모아 보첩에 올려놓게 되면 책을 펴 볼 때 본인의 근원과 파계(派系)를 일목요연하게 알게 될 것이니 옛 선조들이 족보를 중히 여기는 뜻이 여기에 있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께서 역사에 이름을 날리신 분이 많지 않으나 충훈무열(忠勳武烈 충신, 훈작, 무공자)과 학문과 충절이 있으신 선조님들이 대대로 이어 오고 있으니 우리 조상의 원대한 정신이 아니겠는가.
원하건대 모든 종친들이 각자 선조를 욕되게 하지 말고 미덕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니 이 족보를 다시 만드는 뜻을 저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각 파중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종친과 새로 출생한 어린 종친을 전부 수록하지 못하였으니 계속하여 족보편찬 작업을 수행하기를 후세의 종친 모두에게 부탁한다.
서기 1742년 상지(上之)18년 壬戌
함성군 9대손 통훈대부 전행사간원 사간지제교 윤신潤身 근지(謹識)
3. 1758년 戊寅譜 무인보
전 대사간이었던 휘 유신 裕身이 주관하여 종친의 의견을 거쳐 재경 종친은 경파京派라 하고 남도 종친은 향파 鄕派라 하여 향유사들이 협력하여 진행하였는데 책을 편찬하지 못하고 공公이 별세한지라 8,9년을 지내며 보책을 집성하게 되는데 이때에 남도를 오고 가면서 서울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나주종친 억창 (億昌 지춘현감공파조 10세손)이 족보편찬에 협력하였다.
● 무인보 서 戊寅譜 序
한 성씨의 족보는 그 씨족의 역사이니 족보의 체통이 엄격한데 있고 거짓됨이 없다.
중국 당나라 태종때 이수수라는 학자가 성씨 학에 조예가 깊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인물로 세상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뿐이니라. 그를 본 받아 많은 사람들이 책을 만들었는데 의심되는 것과 믿을 수 있는 것이 서로 어그러진 경우가 있었으니 다음 세대에 족보를 편찬하는 자가 철저히 잘 관리하여 추진 할 일이다.
우리 족보가 처음 숙종 14년 무진년(1688년)에 만들어 질 때 족보가 너무 엄격하여 종친의 결의가 너무 간략한 것이 잘못인지라 계속하여 족보를 고칠 것을 의논하던 차에 영조 임술년(1742년)이 친형인 승지공께서 이일을 주장하여 시조이하 9세조 장양공 이후의 파는 서울에 거주하는 여러 종친과 같이 역사적 기록과 몇몇 비석문자를 참고하여 잘못된 곳을 바로 잡고 의심나는 곳은 확실히 하고 빠진 곳은 새로 넣어서 사실을 바르게 정비하였다.
남도지방이 종친의 경우에는 지방의 유사들이 보책이 이미 출판되어 금성 (나주지방)에 사는 종친 억창(億昌 지춘현감공 9대손)이 올라와 승지공에게 말하기를 몇몇 파가 거주하는 지방에서 구 족보와 서로 틀리거나 어긋나게 되어 엄격해야 함을 잃고 있어 소란이 있었다고 하니 공께서 이런 일이 있는가 하고 깜작 놀랐다.
처음에 유사가 남도지방에 있으니 남도지방의 계파를 잘 알 것이라 맏어서 그대로 하였던 것이다.
그해 지방의 종친이 증거를 찾기 위해 문중에서 인정하는 집안의 목판 인쇄 책자 기록을 표준 하여 지방과 서울의 모든 참고 기록을 열람하여 확신을 얻은 후에 승지공에게 보이면서 어디는 어떻고 어디는 어떻다고 하니 공이 고칠 수밖에 없다면서 서울의 종친들에게 알려 수정할 것을 의결하였는데 족보 편찬을 다하지 못하고 공이 갑자기 사망하였다.
재주도 없는 사람이 뒤를 이어 족보 편찬을 맡아 89년이 지난 후에 보책이 만들어지는데 서울의 종친들은 승지공이 뜻하는 바에 다라 약간 갈고 닦고 지방 종친들은 잘못된 것은 수정하고 바로잡음에 있어 선입견에 의하지 않고 서울 외 지방의 종친들의 의견을 세 번에 걸쳐 고증하였다.
또한 갑작스럽게 하여 나중에 후회될까 염려하여 各派의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와서 여러 번 검토하였으니 족보가 보다 권위가 있게 되었다.
당나라 족보 학자인 수소보는 편찬한 책은 성씨별로 투명하게 전하였으나 의견이 달라 각자의 견해를 첨부하였으니 마땅히 우열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 함평이씨 단일성씨 족보가 진실한 것과 아닌 것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은 몇 해가 못 되어 만든 것을 다시 고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을 깊이 기억하여 후세에 주의해야 한다.
새로 편재한 것 중 의심스러운 것은 보는 자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서기 1758년 上之 34년 戊寅 후손 前 大司諫 裕身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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