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족보가 1633년 1차 초보, 1663년 2차 초보에 이어 1688년 최초로 무진보가 발간되어 2014년 갑오보가 발간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1924년 갑자보
1957년 정유보
1988년 무진보
2014년 갑오보를 게재하겠습니다.
2016,08,03
7. 1927년 정묘 갑자보 丁卯 甲子譜
1924년(갑자년) 발의되어3년만인 1927년(정묘년)에 완간되어 발의된 해의 간지를 붙여 갑자보라 일컫는다. 1924년 계조(함성군의 17세손)가 주관으로 각 파의 대표를 선정하여 서울에서 회합을 갖고 계획과 규약을 정하여 3년 만에 발간하였는데 관여한 원로 종친들이 거명되지 않고 있으나 각 파별로 조직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재영(부원군 광봉후손)이 별문을 기록하고 있다.
跋文 :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과 관련된 사항 등을 짧게 적은 글
● 정묘 갑자보 서 丁卯 甲子譜 序
중국 주나라 역사책인 소사에 의하면 족보의 시초는 중국 한나라 연대표 강령이다.
동방에서는 친척끼리 서로 어울리고 교감하기 위해 중세기부터 각각 족보를 만들어 살아온 내력을 알도록 기록하고 문중의 규범에 따라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통하여 종친 간 우의가 널리 펼쳐지도록 하였다.
무진년(1688년) 이 후로 우리 대동보가 수차례 발간되어 많은 종친 이 서로 화목하고 우애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그 후 족보발간이 늦어져 서로 거리가 멀어져 애경사는 물론 만나는 것이 남과 같으니 슬픈 일이다.
지금은 세상이 변하여 동방예의의 도리가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개개인의 마음이 넓고 깊어 예의를 갖추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서로 의지하며 가깝게 지내니 다행한 일이다.
갑자년에 종친들이 협의하여 각파에서 대표를 선정하고 서울에서 회합하고 족보를 편집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규약을 정하여 전력을 다한지가 3년이 되었다.
사람 된 도리가 근본을 중히 여기는 것인지라 우리 시조에서 내려온 자는 다 같이 시조의 손자이고 같은 손자가 된다면 족보를 전체 종친을 대상으로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하면 수많은 종친의 마음이 합하여 질 것이다.
이같이 되면 우리 종족이 반드시 흥성하여 기상이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니 이것이 족보를 계속해서 편찬하는 것 일 것이다.
장차 족보 편찬이 끝나는 날 시조 재각에 모여 씨족의 원류에 대하여 논의하고 제사의 규칙을 정하여 후손들이 계속 이어가도록 하다면 우리 종친들에게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기 1927년 정묘년 7월 가을 후손 계조(함성군 16대손) 근서
8. 1957년 정유보 丁酉譜
1945년 8.15해방 이후 처음 족보를 편찬하였다는데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종손 재기載驥가 주관하여 당시 花樹會가 조직되어 있어 화수회에서 발의되어 정유년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가을에 완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범례를 앞선 족보의 규정을 따르고 추가된 부분만을 정리하였다. 발문 (편집후기)은 용수(광봉 부원군 판관공파, 시조의 30世孫)이 기록하고 있다.
● 정유보서 丁酉譜序
세상의 도리가 변하여 인간사가 흐트러지고 어그러져 이를 다시 합치려면 반드시 씨족을 한데 모으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하고 지역에 흩어진 종족을 모으려면 반드시 그 성씨의 족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뜻이 있는 분들이 족보를 만드는 까닭이다.
우리 성씨로 말할 것 같으면 임진란 후 선후(선조와 후손)가 많이 생략되고 미비하였으나 다행히 면양(충남 당지 면천면)과 나주(전남)에서 옛 족보가 있어 초보를 만들고 그 후 7회에 걸쳐서 족보를 편찬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한 점이 있고 종친을 모두 수합하여 통일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번 갑자보를 편찬한 점이 있다.
문학을 숭상하는 태평시대를 여러 해 지내면서도 부족하고 빠져 완벽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여러 난을 겪은 후라 생활이 어렵고 학문적인 가치가 소홀해지니 족보를 만들어 화목할 수 있는 족보를 만들지 많으면 종친이 남이 되어 같은 종친이 흩어지게 된다.
이에 화수회(종친의 모임)를 계기로 대동보 편찬을 발의하여 각지의 종친들이 서로 힘을 합쳐 정유년에 시작하여 다음해 가을에 출간하니 어찌 시작할 때 이렇게 빨리 끝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행히 어려운 가운데서도 적은 흠결이나 빠짐없이 이 한권의 책안에 취합하였으니 앞선 임진년에 비하면 훌륭하여 이 족보를 가슴에 안고 안심할 수 있다.
이 족보의 규례(범례)는 갑자보에 의하였으나 혹시 보충하거나 삭제하여 다듬은 내용은 훗날 유능하신 종친이 정리하기를 바라면서 개략적으로 위와 같이 기록하다.
1957년 정유년 가을 7월 후손 재기(함성군 18代孫) 근서
9. 1988년 무진보戊辰譜
금번 무진보는 대종회가 발족한 후 처음이며 열한 번째로 발간한 족보이다. 1985년 4월13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결하여 대동보 편찬 사무실을 광주시에 위치한 대종회 사무실에 설치하고 11세파조 단위로 파 분소를 두어 당시 초대 대종회장인 계옥(현령공파)이 주관하여 종무부장 두헌(참판공)씨께서 편집 실무를 맡아 1988년에 발간하였다.
서문에 명확한 고증이나 가정의 호구문적이 아닌 사첩이나 근거 없는 편견으로 선조의 역사와 세대체계를 오도하면서 불참한 일부 종친에 대하여는 지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피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번 뿐만 아니라 열 번의 발간이 있을 때마다 성씨 학에 조예가 있다고 하며 의심스러운 것과 믿을 수 있는 것이서로 맞지 않는 허상을 적어서 우리의 족보를 무사(誣史 쓸모없는 사료)로 만들고자 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에 참여한 원로 종친들은 과감히 이를 물리치고 지금과 같은 함평이씨의 체계요 법통이며 보감으로서 집성된 보책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자리를 굳게 다지고 있다‘
무진보에 참여한 모든 종친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지 못하지만 11세 파조별 후손들로 조직적으로 참여한 명단이 대동보에 기록되어 있다.
● 무진보서 戊辰譜序
족보는 원래 중국 육조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왕대실록과 권문세가의 가승제도가 국시와 통치의 이념을 성취하고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에 와서 도덕윤리를 일상생활의 기저로 숭조애국의 미풍양속이 승화되면서 성종 이후부터 명문거족들이 동일혈족을 부계중심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보사譜事를 하였으나 임진왜란(1592~1599년) 때 여러 씨족의 족보는 수많은 문헌과 함께 소실되었고 숙종이후 에야 족보가 부활 보급되었다.
우리 족보는 인조 11년 계유초보를 시발로 제2회 계묘초보가 발행되었고 숙종 14년 무진년(1688년)에 판각보板刻譜가 발간된 후 1957년 정유보까지 8회의 대동보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면면히 발간된 것은 인륜지덕을 근본으로 하는 자손들의 조상을 숭배하고 종친 간 화목을 계승한 윤리정신의 소산입니다.
정유보(1957년)를 편찬한 지도 어연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지금의 풍속은 핵가족화 또는 서구화 해외진출 등으로 가치관 혼미에서 오는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하는 풍속과 순박한 종족이 수많은 갈래로 나눠지는 혈족의 의의를 망각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족보 편찬의 필요성이 종족 간에 거론이 되어,
1985년 4월 13일 전국대의원총회에서 대동보 편찬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대종회사무소에 대동보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11세조 파단위로 파 분소를 정하였다.
각파 대표자 및 관계자 연석회의에서 대동보편찬의 지표로 이전에 펴낸 우리 족보에 대하여 충분한 토의를 거쳐 범례를 책정하고 정유대동보를 기저로 십만 여 종족을 수록하여 소기의 대동보가 완성되어 모든 종친과 더불어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 씨족의 혈맥을 체계화하고 종중 질서를 확립하고 숭조 애족하는 마음을 드높여 높으신 학행과 조상의 유지를 더 한층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킬 기회로 사료되옵니다.
족보는 우리의 보감으로서 대가족의 세계世系와 선조님의 높은 관작과 충훈忠과 인륜지덕으로 성찰하게 되어 있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높은 학덕으로 은일(隱逸 속세를 떠남)로 지낸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금번 보사를 원만히 추진하기 위하여 충분한 시간의 여유를 두고 등재할 것을 통보 및 방문 등으로 홍보하였으나 명확한 고증이나 공가公家의 집에 있는 문서가 아닌 가승첩이나 근거 없는 편견으로 선조의 역사와 대수의 체계를 오도하면서 족보 편찬 사업에 불참한 일부 종친에 대하여는 지극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정유보에 이어 북한에 거주하는 종친이 누보됨은 애석지감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이상으로 대동보 발간취지와 과정을 대략 기술하고 금번 대동보 편찬에 소양과 여건이 불비한 처지에 대임을 맡아 종친회의 결정에 따라서 관장하였으나 어찌 완결하다 단언하리오.
보완을 요하는 사항이 있다면 추후 족보를 새로 할 기회로 미루고 이번 족보 편찬 사업에 4년여 동안 헌신애족일념으로 편찬 실무에 봉공하신 대종회 종무부장이신 두헌(斗憲 참판공) 족숙族叔과 각파 대표임원제위에 위로의 말씀과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서기 1989년 4월
함평이씨대종회장 함평이씨대동보편찬위원장 계옥(현령공)
임술보(1742년) 항열도설
李儒○, ○緖, 敦·敏○, ○憲, 啓○, ○範, 載○, ○行, 建○, ○聖·賢
무릇 사람의 이름을 항열에 따라 짓는 것은 한편으로는 일가끼리 서로 화목 하라는 의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근원을 찾아서 여러 파를 정하는데 의미가 있다.
우리 이씨가 옛날부터 근대에 이르는 동안 혹은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지은이가 있고 혹은 가까운 친척과 사촌형제지에도 각각 다르게 이름을 지은 자가 있으니 타인이 보면 한 뿌리의 이씨인 줄을 알지 못하고 이제 수보하는 때에도 형제의 순서 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어 여러 군데에 있어 결함이 많았다.
종친들이 항렬을 정할 것을 상의하여 다른 의견이 없어 장양공의 11대 종손 창운의 운자(運字 22세조 항렬)를 따라 연장자도 다 고쳐서 통일하고 여러 파의 거리낌이 없는 자를 10世 名字를 정하여 상하로 위와 같이 배열하여 영구히 아저씨뻘 되는 항렬로 결정하오니 우리 뒤를 잇는 후손들이 다 같이 이 뜻을 알아 비록 후손이 멸하고 친척관계가 멀어진 후에라도 꼭 지켜서 변치 아니하면 성명 듣는 사람이 묻지 않아도 함평이씨인 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종친 간 멀고 가깝고 할 것 없이 그 항렬을 따라 서로 호칭하여 부모
동기간과 같이 하면 돈돈한 관계가 세상에 널리 퍼져 세대가 매우 멀어지거나 파가 분열된다고 해도 항열에 따라 세대를 맞추어 보고 나이를 알게 되면 순서를 알게 될 터이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종친들은 항상 이를 생각하여 이름을 지을 때 항열을 따르도록 각자 후대에 남기기 바라는 바이다.
계축보(1853년) 항열도설
李奎○, ○善 , 源○, ○植, 熙○, ○基, 鎭○, ○洙, 秉○, ○烈
옛적 임술년에 지포공이 족보를 편찬하고 운運자 항열(22세) 이하 10世 항열자를 정하여 범례 아래에 부기하고 종족 간에 서로 화목하고 뿌리를 찾는 기술을 가르치는데 노력하였으니 종친 중에서 항열이 낮은 사람이 미리 항열을 알고 이름을 짓하는 것이 서로 혼동되지 않아 그 동안 사이가 멀었다 하더러도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돈독하니 우리 종족에 기여한바 크다.
지난 정묘보 (1807년)에 敦,敏(25世)을 함께 써서 이름을 지은 자가 있었다.
이제 임술년이 100여년 지난지라 종중 항열이 낮은 자가 연로하여 손자를 두면 임술보 때 정한 항열이 많이 남지 않았다.
이에 족보를 다시 편찬하면서 聖字이하 10世 항열자를 제정하되 오행 상생의 역학에 따라 奎, 善, 源, 植, 熙, 基, 鎭, 洙, 秉, 烈 10字를 제정하여 한 字는 上, 또 한 字는 下로 상기와 같이 배열하여 모든 종친이 오행상생 복을 받아 영세토록 무궁하도록 하였다.
원하건 데 모든 종친들은 이 뜻을 몸소 성찰하여 위로는 조상을 섬기고 족보의 중요성을 알고 아래로는 종중 상호간에 종규를 지켜 영원토록 오행 상생의 덕을 이어나간다면 우리 종친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이 10字 중 거리끼는 字가 있으면 각각 집안의 항열을 따라 변경하여 사용하여도 무방하다.
지포공께서 우리 종족이 노력하며 근면하게 살아가지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할 것이다.
10. 2014년 갑오보甲午譜
금번 갑오보는 2012년 12월 시작하여 2014년 12월까지 2년간의 걸쳐 발간하였다. 이번 족보 편찬은 지난 1988년 편찬한 무진보를 함평이씨대종회 홈페이지에 등제하여 최초로 인터넷 체계를 구축하였다.
누구나 쉽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본인의 족보를 확인하고 추가, 정정 등 쉬게 하였고 수단신청 역시 이메일 통하여 신청하도록 하였다.
인터넷 족보를 검색 할 때 반드시 족보상의 이름을 알아야 검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지난 족보까지는 반드시 항열에 의한 이름을 등제토록 하여 족보상의 이름과 실제 이름이 다른 경우 족보상의 이름을 모르면 검색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폐단이 있어 이번 족보에 등제하는 이름은 실제 부르는 이름으로 등제도 가능하게 하였으며 희망하는 경우 최종학력과 경력을 기입하도록 하였다.
종전까지 대동보를 1권부터 파별로 연속하여 발간하여 10권으로 편철하여 구입에 따른 많은 비용부담, 보관의 어려움이 있어 이번 대동보는 파별로 구별하여 파보형태의 대동보로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계
1권에는 족보서문, 파별로 16世까지 묘지와 제각 사진, 上係편인 시조부터 10世까지 그리고 색인부를 수록하였으며, 2권은 숭년감정공파, 동백진사공파, 운봉공파, 3권은 지춘현감공파, 지양파, 교수공파, 4권과 5권은 함성군파, 6권은 참판공파, 7권은 대교공파, 성근진사공파, 지평공파, 8권은 숙연부사공파, 규연공파, 종성군파, 9권은 기성군파, 10권과 11권은 효우공파, 12권은 현령공파, 외부사공파, 목사공파, 13권은 참판공파, 손무현감공파, 사직공파를 수록하여 총 13권으로 하였다.
따라서 족보를 구입할 경우 1권과 본인의 속한 파의 족보를 구입하여 2권 또는 3권이 되어 2권은 5만원, 3권은 7만5천원의 비용으로 구입할 수 있게 하였고 전질 13권을 30만원에 공급하였다.
족보를 구입하지 못한 종친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나 쉽게 족보를 검색해 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1742년 임술보 편찬시 최초로 23世 유儒자 부터 32世 건建자까지 정하였고 1853년 계축보 편찬시 33世 규奎자 부터 42世 열烈자가까지를 정하였으며 이번 족보 편찬시 43世 증增자부터 62世 걸杰까지를 정하였다.
● 甲午譜 序
원래 족보는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는 고려왕실의 왕대실록과 권문세가의 가승제도로 이어져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종조(1469~1494) 이후부터 동일혈족을 부계중심으로 체계화하여 기록하는 보사작업을 시행해왔으나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거의 다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선조님들께서는 어렵사리 불원천리일가를 찾아 문적을 모으고 동족의의 뿌리와 줄기를 일일이 다시 확인하고 이어서 엮은 노작勞作인 구초보 1. 2권(1633年 인조11年. 1663年 현종4年 간刊)마저 유실되어 현존하지는 않지만, 숙종14年 이를 근거로 하여 집대성한 무진보(1688年 刊)를 통해 단절됨이 없이 면면히 이어온 그 맥락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咸李는 천년의 장구한 씨족사 속에 4백년 가까운 족보사를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명문으로 금번 열두 번째로 2014年 갑오보를 또 출간하여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종전의 1988年 무진보를 발간한지 만 26年만의 경사라 하겠습니다.
이번에 편찬된 우리 咸李의 大同譜는 始祖이신 諱“彦”할아버지로부터 천년의 혈통을 이어온 상계 선조님들의 행적을 수권首卷으로 모아 한 질의 책속에 묶고, 다른 한 질에는 11世祖 각파 단위로 구분하여 자손들의 행적을 세대별 서열별로 상세히 기록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특히 이번 대동보는 신·구를 아우르는 지식정보화사회에 걸맞게 국한문을 겸용한 보책과 인터넷 족보 두 가지로 편집하여 신구世代가 공히 활용할 수 있고, 또 인터넷에 영구히 보존되어 언제 어디서나 시공의 제한 없이 용이하게 열람할 수 있도록 특색있게 편찬되었습니다
무진보 편찬이 20여년이 지나면서부터 종원들 사이에 하루가 달리 변화무쌍한 세태에 부응하여 신구시대가 함께 공감하는 대동보편찬사업을 서두르자는 소리가 갈수록 높아졌고 해가 지나면서 대종회의 시급한 당면과제로 급부상한 것이 엊그제 같은 일인데, 우려했던 만탄을 하나하나 극복하며 추진했던 결과 당초 기획했던 목표치에 접근하도록
별탈이 없이 완결을 보게 되었음을 감히 보고 드리며, 우리 13萬 종친님들과 함께 이 보람과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는 평소 종회와 종족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咸李의 영구한 미래를 걱정하며 발전을 염원하는 각파 종회장님들의 헌신적인 노고와 이를 뒷받침하는 대다수 종친님들의 적극적인 참여의 결과라 확신하며 아낌없는 찬사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대동보의 편찬은 종전의 무진보 편찬시와는 달리 산업화 정보화가 급속히 고도화하는 사회적 변동으로 농어촌의 집성촌이 사라지고
핵가족화로 인한 일가간의 연결이 두절되며, 서구문화의 급속한 유입으로 우리 씨족사회의 근간이며 전통적 가치인 호적법과 동성동본금혼법까지 폐지되는 등으로 족보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는 때라 수보와 편찬과정에 실로 많은 고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부 명확한 고증이나 공적인 문서가 아닌 사견과 근거 없는 억측을 내세워 선조의 역사를 왜곡 불신하고 오도하면서 보사에 불참한 종친도 있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아직 분단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북한에 거주하시는 다수한 종친들이 이번에도 함께 참여하지 못함을 무척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모두가 “水一源 木同根”의 한 뿌리 한 핏줄임을 확인하고 대동 화합하는 광영된 후일을 다시 기약해 봅니다.
특기할 사항으로 이번 대동보 수보과정에서 咸李라는 사살은 인지하면서도 직계선조와 대를 모른 채 살아왔던 몇몇 종친들이 다행히도 그 뿌리를 찾아 확인하고 각파 대수의 체계에 확실히 연계할 수 있었던 사실은 본 족보편찬사업의 큰 수확이며 보람으로 기리 기억되리라 믿습니다.
아울러 이번 대동보편찬에 부득이한 사유로 불참하셨거나 누락된 종친으로 추후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인터넷 보책에 수록할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오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라며, 수보와 편찬과정에서 정확성을 기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오탈자와 미비된 부분이 있을 것임을 상정하여 오기표를 준비할 것이니 보책이나 인터넷 족보에 오자나 탈루된 부분이 있으면 즉시 대종회에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본 족보 편찬중 대종회장 임기만료에 따른 편찬인 임무교대가 있었지만, 전혀 혼란이나 혼선이 없이 예정대로 잘 마무리하게 된 것은 3개 성상을 한결같이 편찬 실무에 종사하신 재홍 편집위원님과 임원님들, 그리고 각파 종회장님을 비롯한 편찬실무담당님들의 헌신적인 공로의 덕이라 생각하며 저희 두 편찬인은 이 분들께 거듭 감사와 찬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本 족보가 햇빛을 보기까지 남다른 전문성과 식견으로 기획 단계부터 보책과 인터넷 족보 편찬 편성의 전 과정 및 제책분질製冊分秩과 사후관리까지 꼼꼼히 도맡아 챙겨주신 “뿌리정보미디어”의 한상억 사장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이번 갑오보 발행에 즈음하여 우리 13萬 종인 모두는 이 족보상에 떳떳한 이 시대 咸李의 주인으로서 확고한 자존의식과 존재감을 갖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분화된 시대에 각자 어느 분야에 종사하던 자랑스런 咸李人의 모습으로 한층 더 進化하고 귀감된 삶을 사는 것이 언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어렵사리 편찬한 이 갑오보의 진정한 가치이며 의의라 생각하면서 자손만대 咸李의 무궁한 번영과 종원님들 각 가정에 만복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14(甲午). 12 .
前 大宗會長 建 一
함평이씨대동보편찬위원회 위원장
大宗會長 正寧(憲)
갑오보(2014년) 항열도서
李增○, ○鋕, 溢○, ○棋, 煌○, ○均, 鉅○, ○準, 桓○, ○燮
埈○, ○鈗, 治○, ○業, 煐○, ○坤, 鈺○, ○泓, 楚○, ○杰
우주 천지가 형성될 때에는 음향오행이 작동하여 만물을 다스려서 만들었다. 하늘의 이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은 법과 기강을 확립하여 사람의 도리를 오행윤리에 있듯이 모든 것을 정도하게 각기 공생하나니 도리를 부정하며는 천하가 혼돈 타락 하여지고 국가는 혼란하고 쇠망할 것이요 사람의 도리를 부정하면은 사람의 가치관의 상실로 영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모든 일에 부정하면 순리와 자연법칙과 같이 조인서열도 혼돈하여 기강이 문란하여 함평이씨의 선조님에 대한 불경과 종친 간에 불화를 자초하여 사회의 낙오족이 되려니 항열 질서를 확립하여 백세지친의 미풍의 도를 엄중히 준수 봉행하여 우리함평이씨의 미덕으로 타 에 과시 하느니라.
무진 대동보에 烈字까지 있어 차기의 항열도는 함평군세보咸平君世譜에 등재된 항열도를 우리 대동보에 등재하여 자손만대에 시행하기 바라며 항열에 준하여 위계질서가 바로 서길 바라노라.
그리고 함성군파종중에서 항열도를 사용토록 허락하여 주신데 대하여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금번 갑오대동보에 항열도를 등재하게 됨은 우리 함평이씨의 종통宗通을 선양하며 선조님을 공경하고 종친간의 돈목종친하는 귀감이 되어 줄 것을 바라며 종친님들의 영원무궁토록 번영과 영달을 바라노라.
서기 2014년 12월 갑오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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