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족보가 1633년 1차 초보, 1663년 2차 초보에 이어 1688년 최초로 무진보가 발간되어 2014년 갑오보를 발간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는
1807년 정묘보
1853년 계축보
1896년 병신보의 서문을 게재합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게재하겠습니다.
2016,08,02
4. 1807년 정묘보 丁卯譜
여섯 번째 발간된 족보로 전 병조참판 겸 의금부사였던 강운(康運 함성군의 12세손)이 주관하였는데 휘 신수(頣壽 함성군의 11世孫)가 1790년에 발의하여 초단의 정본이 거의 작성된 상태에서 돌아가시니 그이 아우 정수鼎壽씨가 맡아 교정은 종장宗丈 관운(觀運 함성군 12世孫)이 담당하고 호남 종친 휘 유형(儒衡 기성군의 13세손)과 윤서(贇緖 효우공 13代孫) 두 분께서 협심 협력하여 편찬하였다.
● 정묘보 서 丁卯譜 序
우리 대동보가 숙종(무진, 1688년)에 시작하여 1742년 영조때 다시 펴내고 또 1758년에 다시 발간하여 71년 동안에 세 번 족보를 하였으나 그 중에 임술보는 우리 선조께서 친히 교정하여 엄격한 체계를 갖춘 올바른 족보로 후세에 기본이 될 만한 것이라고 소생은 믿었다.
모든 종친들도 이 족보가 바르다고 말하니 족보를 다시 만들 때 마땅히 임술보 범례로 준칙을 삼아 약간 수정할 뿐이다.
지난 경술년에 족보 편찬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소생이 관서지방에 체류한 관계로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족보가 완성되지 못하고 그 일을 맞으신 분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시니 많은 종친이 슬퍼하였다.
어느 날 종친 어르신이신 정수(鼎壽 함성군 10代孫)께서 그 당시 유사의 아우라면서 말하기를 이 족보를 완성하지 못하면 형님이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니 소생에게 족보를 맡아 줄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소신은 임술보를 기본으로 한다면 참여하겠다고 몇 차례 다니면서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이번에 족보를 편찬하여 완성한 것은 누구나 고대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족보의 주요내용과 부가 사항은 전부 임술보의 순서를 모방하였으며 특별히 12파의 부附가 원에 편입된 것은 그 믿을 만한 물증이라 할 수 있으니 그 방주를 보면 짐작할 것이다.
※ 12파 : 극해파, 함평군장파, 함평군차파, 군수여규파, 부사여장파, 수사춘수장파,
수사춘수차파, 담양부령손수파, 영발파, 중랑장인좌파, 간선대부수년파, 현감손무파
처음의 부자형제가 나중에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게 되니 그 파가 갈리고 같은 문중 사람이 멀어져 남이 될 것이다.
옛날 중국 송나라 사람 문정공이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종친간은 가까운 사이인데도 가깝고 먼 사이가 있으니 선조님께서 보시면 안타깝다 하실 것이다.
이제 호남은 우리 문중은 다 같이 문정공의 마음을 안다면 소원한 자가 친해지고 멀었던 자가 가까워질 것을 소신뿐만 아니라 모든 종친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상지 정묘 1807년
후손 가선대부 前 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경운(庚運 함성군 12대손) 지음
● 정묘보 중간록 丁卯譜 重刊錄
옛날 중국 역사학자 반고가 한나라의 역사를 쓰다가 마치지 못하고 반고의 여동생 소昭가 완성하였으니 중국 지방에 역사를 서술할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임금이 소에게 명한 것은 그 형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그에게 완성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우리 족보가 경술년(1790년)에 시작하여 서신을 발송하여 수단지를 받고 교정은 종친 관운(觀運 지춘현감공 11대손)이 맡았으며, 파에 따라 초본을 바로 잡은 사람은 돌아가신 형 이수(頤壽 함성군 10대손)씨이다.
정본이 거의 완성되었으나 인쇄를 하지 못하고 두 분께서 세상을 떠나 18년이 자나도록 족보를 완성하지 못하니 개탄하면서 처음 족보를 맡아 한 사람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불초 소생이 이일을 이어 계속하려 했으나 식견이 없어서 종중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병도 있어 감히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작년 여름부터 병이 조금씩 호전되었다.
돌아가신 형이 쓴 정본과 각파 초본을 열람하여 본 결과 종이에 좀이 먹을 것이 대부분이라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능력이 부족함에도 간행하기를 결심하고 전국의 종친들에게 연락하고 서울에 거주하는 12분의 종인들과 면담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2월중에 약간의 자금으로 집에다 목판 인쇄시설을 갖추고 서울과 지방에 연락하였더니 4월중에는 호남 종친인 기성군 후손 유형(儒衡 기성군 12대손)과 효우공 후손 윤서(贇緖 효우공 13代孫)씨가 천리를 달려와 동참하였다. 윤서는 무인보(1758년) 발간 때 참여한 평릉유사 두응(효우공 11대존)의 손자이다.
두 분께서 합심 협력하여 아침부터 밤늦도록 1년이 못되어 일을 마치니 원본은 돌아가신 형님이 만든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추록을 미처 수정하지 못한 사람과 주석의 내용이 올바르지 않는 사람은 보고들은 내용에 따라 약간 수정하였다.
미약한 자가 맨손으로 족보 편찬 장소를 설치하니 남들이 믿지 아니하고 비웃더니 족보편찬을 마치니 빨리 이루어 냈다고 칭찬하였다.
족보가 배부됨에 종친들에게 널리 알리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내가 대답하기를 경술년(1790년)이 아니면 어찌 큰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사양하였다.
12분의 종친에게 내가 미약하여 이일을 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계속하도록 기회를 주어 돌아가신 형님께서 못 다한 책임을 완수하게 하였으니 하늘의 뜻으로 생각한다.
정묘 10월 하완 후손 정수鼎壽 記
5. 1853년 계축보 癸丑譜
정묘보 이후 47년 만에 발간한 대동보이다. 휘 유중(儒重, 함성군의 13世孫)이 주관 하에 전국 종친의 족보 편찬 논의가 있어 휘 유로(儒璐 기성군 13세손)와 남평공의 후손 두운(참판공12세손) 두 분이 협력하여 서신을 발송하는 한편 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감수와 교정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민도(敏道 함성군의 15세손)와 민정(敏鼎 함성군 15세손)이 이 일을 맡게 하고 족보 편찬 장소를 서울과 호서의 중간지인 논산의 함은군 휘 삼(森)의 별체에다 설치하고 호남족의 중요한 일은 유창(儒昌 함성군의 13세손)이 주로 맡아 족보의 중요한 체계를 확립하고 종친의 법통 지키는데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계축보 서 癸丑譜 序 1
우리 대동보가 숙종 무진년(1688년)에 시작하여 순조 정묘에 이르기까지 120년이 되는 동안 족보가 4번 이루어 졌는데 이제 정묘년(1807년)이후 46년이 지났다.
종친 어르신들께서도 족보에 등재되지 못하였다고 한탄하고 있는데 그 자손들은 오죽하겠는가.
조상이 멀어지면 자손이 많아지는 것은 나무가 늙으면 가지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니 족보를 하기가 옛날보다 더 어렵게 되므로 선조들의 돈목을 기하고 흩어진 후손들이 모이는 것이 우리 종중의 시급한 과제이다.
45년이 지난 지금 전국 각지의 여러 종친의 의견이 있으나 사업이 방대하고 각자 사정이 어려워 여러 번 접촉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몇몇 문중에서 각자 파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보를 만드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근래에 호남지방에서 발의하고 연락한 사람은 유로(儒璐 기성군 12대존)이고 족보를 만드는 장소는 공주 함은군(함성군 8대존, 삼森)의 별장에 설치하고호서(충청지방)의 사무를 주관하는 사람은 유창(儒昌 함성군 12대존)이었다.
어렵고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족보사업을 마무리 하였으니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힘든 일을 맡아 할 사람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 그 일을 해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 형편상 교정이나 인쇄하는데 참여하여 살피지 못하여 민망함이 많을 따름이다.
생각해보면 족보의 중요한 점은 엄격한 체계를 갖추고 핵심의 내용을 이어가는 것인데 편찬기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종규가 점점 희미하여 세속에 따라가고 습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최근 타성의 족보가 말썽이 있어 시대의 흐름을 타고 항열은 같아도 대수가 틀리고 후계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계통을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금번 일이 여러 사람의 현명하고 굳건한 지조로 마땅히 이 같은 후환이 없어야 하고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을 생각하여 최선을 다하는 바이다.
1852년 금상 3년 임자 중하 기망旣望(음력으로 매달 열엿샛날)
후손 유손(儒重 함성군 12대손) 근서
● 계축보 서 癸丑譜 序 二
우리 함평이씨의 족보가 지금까지 4본이 있으니 제1본은 옛날 풍덕부군(함성군 7代孫)이 소장하고 있는 유점사의 판본으로 책표지를 다시 만들었고 범례가 간결하면서도 엄격하며 고증이 잘되는 등 잘 만들어 보기 편리하다.
그 후 3본은 1본을 표준으로 하여 임술(1742)년에 편찬하였고, 무인년(1758)에는 윤색(潤色 본디 내용보다 다소 과장하고 꾸밈)하고 또 정묘년(1807)에 중간(重刊 이미 펴낸 책을 거듭 펴냄)하였는데 이제 정묘년까지 47년이 지나 사람이 바뀌어 변하고 후손이 점점 멀어지니 이제 족보를 바로잡지 않으면 어렵게 된다.
이번에 종손 민교(敏敎 함성군 14世孫)가 파보의 번역을 마쳤는데 전국종친들이 합보하자는 의견이 있어 불초 소생으로 하여금 이 일을 맡게 하고 기성군 후손 유로(儒璐 기성군 12대손)와 남평공(시조 11世孫, 현령공 파조)의 후손 두운(斗運 현령공 11世孫) 두 분 종친께서 헌신하고 재정을 담당하면서 한 편으로는 서신을 발송하고 또 한 편으로는 자금을 모금하니 다섯 종파의 큰 행복이다.
이 사업이 대단히 신중해야 함으로 감수하고 교정하는 사람도 구하기 어려웠다.
族孫 민도(敏道 함성군 14대손)와 민정(敏鼎 함성군 14代孫)에게 그 일을 맡게 하여 사실에 입각하여 정확히 하면서 가승을 참고할 만 한 자를 널리 모집하여 세밀하게 검토하고 족보에 누락된 사람은 논의를 통해서 윗대 할아버지의 자손이 마땅히 어떤 항열이 될 것인지 사실을 참고한 후 기재하였다.
어떤 파에서 누락되어 외지에 살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세하게 자료를 수집한 후 기재하였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멀어져 진실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리하였다.
그러나 계통이 너무 멀어 옛 족보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세월이 너무 빨라 역사적으로도 고증할 수가 없어 사사로운 감정에 끌리어 억지로 대수를 보태어 항열을 맞춰 놓으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버리는 것으로 더욱 주의해야 한다.
우리 종친이 5代는 가까운 친척이요 10代는 먼 친척이 되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百代千代가 되어도 한 몸에서 태어난 같은 종족이다.
부모 같고 형제 같은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는 것이 중국의 문인 소씨의 말과 같고 각자가 충성스런 마음이 정립되면 나라에서 유능한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단, 가까이 있는 사람과는 친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친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인데 만나거나 들어본 적이 없어도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다른 것은 족보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니 선조를 존대하고 종친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우리 선조의 인후한 덕이 후손에게 흘러내려 지금까지 가풍을 세워 오늘날 이 족보를 편찬하게 되니 우리 문중의 경사라 할 수 있다.
불초 소생이 원래 부족한 사람이지만 족보편찬에 참여하였음은 족보의 대체적인 그간의 사정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서기 1853년 癸丑 5월 후손 유창(儒昌 함성군 12代孫) 근지謹識
6. 1896年 병신보 丙申譜
1892년(임진년)에 발의 되었는데 당시 홍천 군수였던 근헌(근헌 함성군 16世孫)이 주관하여 군수 민석(함성군 15世孫)과 교리 민영(敏英 함성군 15世孫)과 종손 계흥(함성군 17世孫)과 서울에 거주하는 종친들이 모여 회의 끝에 결정하고 그해 가을에 각 파에 서신을 발송하였다. 서신은 영남, 황해도, 호남지방 등 전국 각파에 전달되었고 호남은 함평이씨 문중이 일어난 곳으로 서신뿐만 아니라 친히 가서 상의하는 게 옳다하여 호남 쪽에는 민석이 영남에는 종서가 여러차례 방문하였는데 종친들이 즐거운 맘으로 협조하였다.
서울에 인쇄소를 마련하였으나 왜병들의 소요가 있어 단양 금수산으로 옮겼지만 여기도 민란이 있어 나주 선영근처의 종친 집으로 옮겨 족보를 발간하였다.
여기에 협력한 종친은 유사 유보(참판공 13세손), 봉헌, 수헌의 참판공 후손과 영헌(潁憲 효우공 16世孫) 민섭(敏燮 현령공 15세손)의 많은 종친들의 노고가 있었다.
특히 영헌께서 중도에 돌아가시자 그 아들 계성이 이어받아 계속 맡았으며 교리 민영과 감역 계순(함성군 17世孫)의 의견에 따라 나주 분토동 선조 재각에서 발의 된지 5년 만에 인쇄를 마쳤다.
● 丙申譜 序
족보는 보통 30년 만에 한 번씩 다시 발간하는데 우리 대동보는 고려시대에는 없었고 이조 숙종 무렵인 무진년(1688년)에 처음 만들고 그 후 임술년(1742년)에 다시 편찬하고 무인년(1758년)에 세 번째, 정묘년(1807년)에 네 번째, 계축년(1853년)에 다섯 번째로 편찬하였는데 그 간격이 40년도 되고 50년도 되어 발간해야 할 시기가 지났다.
그러다 보니 선조님들이 빨리 족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후손들이 번창 할수록 관계가 서로 멀어져 남같이 될까 염려하였다.
이제 계축년 족보까지가 40여년이 지났으니 하루라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족보는 선조를 밝히고 자손을 한데 모으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조상을 바로 모실 수 있고 한 가족이 번성하여 수많은 후손으로 갈라져도 후손이 없는 자도 계속 이어가게 하여 종친 간에 화목하고 의롭게 살아간다면 효도와 형제간 우애하는 마음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고 후세에 모범이 되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 문인 정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자기가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면 근본을 잃어버리는 것이라 하였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본인은 족보 하는 일에 일찍 뜻을 두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시작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從叔 민석(敏錫함성군 14代孫)씨가 족보를 만들겠다는 뜻을 세우고 영남, 황해도, 충청남북도에 연락하였다.
호남은 우리 이씨의 집성촌과 같으나 친하게 지내는 종친이 없고 지역이 넓으므로 서신으로만 연락할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상의하는 자는 의견이 있어 의논하니 모든 종친이 즐겁게 참여하고 협조하였다. 서울에 활자판으로 인쇄소를 마련하였는데 오랑캐의 소요가 있어 충북 단양 금수산으로 옮겼으나 또 전쟁의 징조가 있어 나주 선영의 종친이 거주하는 곳으로 옮겨 5년 만에 마무리하였다.
여러 종친들의 합심하여 이 일을 이루었는데 특히 민석씨가 아니면 이 일을 완성할 수 없었고 향유사 유보(참판공 13世孫)와 양헌(효우공 16世孫)이 힘이 되었는데 영헌께서 중도에 돌아가시자 그 아들 계성이 이어받아 계속 맡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되돌아보면 본인이 유사를 맡았으나 관리생활에 분주하여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다행이 유보씨께서 끝까지 교정을 맡아주셨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 씨족의 족보가 30년 후에 다시 편찬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다.
서기1896년 병신년 후예 통정대부 홍천군소 근헌(함성군 15代孫) 근서
● 증간서사 重刊叙事 (서사 :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시간의 연쇄에 따라 있는 그대로 적음)
무릇 족보는 그 씨족의 역사를 말한다.
중국 소씨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함평이씨에서 추진하는 족보편찬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이가 없음은 그 계통을 밝히고 씨족을 모으기 위함이다.
우리 함평이씨의 족보가 숙종 무진년에 시작하여 계축년까지 5번에 걸쳐서 발간하였는데 이제 계축까지가 40년이 지난지라 어느 날 교리 민영(함성군 14대손)에게 말하기를 내가 족보 편찬에 뜻을 둔지가 오래 되었으나 함께할 사람이 없다 하였더니 그런 뜻이 있으면 속히 추진해야지 미루면 되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수사 종서(함성군 13대손)씨와 함선 계흥(함성군 16 대손) 및 서울에 거주하는 종친에게 알려 몇 차례 회의 끝에 결정하고 임진년(1892년)에 각파에게 서신을 발송하였다.
그 다음해에 족보편찬 장소를 서울에 설치하고 수단과 비용을 모금하여 정본은 거의 완성되었으나 출판하지 못하고 민란이 일어나 호남의 종친 3~4명과 유보(참판공 12 代孫), 영헌(효우공 15대손)이 충북 단양 금수산에 들어가 인쇄소를 설치하여 인쇄를 시작하였는데 중간정도를 마쳤는데 또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있어 부득이 전남 나주시 다시면 분토동으로 갔다.
분토동은 종친들이 많이 거주하며 선산이 있는 곳으로 참판공 15대손 봉헌, 수헌과 현령공 14대손 민섭이 서로 협심 전력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여 해를 넘기지 않고 완성하였다.
여러 가지로 미숙한 제가 족보를 이 일을 하자고 주장하니 처음에는 여러 사람이 무모한 일이라고 비웃으며 믿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깜짝 놀라면서 지금과 같이 어수선한 세상에 어떻게 이 큰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허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처음 일을 하자고 문서를 발송한 사람은 문중 어르신이고 글을 쓴 사람은 문중 책임자이며 나는 유사를 맡아 서로가 이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기 호남지방의 종친 중에 어쩌다 간간이 누락되거나 잘못된 데가 있어 족보작업을 시작하기 어려운 일인지를 알면서도 수단을 제출하지 않은 것은 본인의 책임이고 멀리 떨어져 있어 알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가 원인이 있으므로 앞으로 족보를 다시 발간하는 사람은 이를 거울삼아 많은 종친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바란다.
서기 1896년 병신년 8월 상한(上澣한 달 중 1일부터 10일상이)
후손 민석(함성군 14대손) 근서
● 신보기실 新譜記實 -
족보를 발간하는 규정과 과정은 범례와 서문에 나와 있으니 달리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번 발간하는 족보는 임진년 봄에 시작하여 계사년 겨울에 편찬 장소를 마련하고 수단지를 받아 충남과 호남지방의 서너 명의 종친이 함께하면서 원고를 정리하고 교정하였는데 증간정도 되었는데 갑오년(1894년) 봄과 여름에 토적의 소요로 부득이 중지하고 본인 또한 경상도에 출타하여 수년간 머물다가 금년 가을에 귀가하니 민석(함성군 15대손)이 호남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지난 족보사업이 각종 소요로 정지 되었으나 막중한 일을 하루라도 지체할 수 없어 충청 호남의의 종친과 같이 정본을 가지고 충청도 금수산에 들어가 인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적들이 소요로 다시 나주 분토동 선조의 재각에서 인쇄를 마치고 새로 만든 족보 몇 권을 가지고 왔다고 하기에 자세히 살펴보고 칭찬하였다.
족보 편찬 사업은 대단히 큰일이라 평시에도 하기 어려운데 어려운 시기에 여러곳을 돌아다니면서 그 일을 마쳤으니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이 훌륭하고 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일을 추진함에 착오가 전혀 없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교리 敏英(함성군 14대손)과 감역 啓舜(함성군 16代孫)이 일일이 열람하여 잘못된 사람은 고치고 빠진 사람은 추가하여 출판할 때 범례와 많은 의견을 책머리에 올려 수단이 오지 못한 지역과 누락된 점을 한탄하였으나 그 시절 어려움이 많아 어찌할 수 없었다.
큰일은 처음과 끝이 있음이 다행이라 어찌 완벽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사실을 여기에 기록하여 나중에 의혹이 없게 하고자 한다.
서기 1896년 병신년 겨울
후손 통정대부 전 창원부사 鍾緖(함성군 13世孫) 記實
● 신보기실 新譜記實 二
무릇 사람이 족보를 하는 것은 종친 사이를 두텁게 하고 계통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다.
이 함평이씨의 족보는 숙종 무진년(1688년)에 시작하여 철종 5년 계축년(1853년)까지 5번째인데 이제 계축년까지 40여년이 지나 후손이 더 번창 할수록 더 멀어지고 기록하지 않으면 앞으로 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손 계흥(함성군 15代孫)이 이를 개탄하여 족보를 다시 하고자 하였으나 시작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하루는 민석(함성군 14代孫)씨가 조상의 음덕과 종친 간 화목을 강조하며 종친들에게 족보에 대한 의견을 제창하여 수단과 자금을 모금하여 나주 분토동 재각에서 인쇄하여 5년 만에 완성하였으니 민석씨가 아니면 이렇게 되었겠는가.
그의 노력이 대단하여 그에 대한 모든 내용을 종서(함성군 13대손)씨가 정확히 기술하고 글자의 잘못된 것은 민영씨가 분명히 밝혀 교정하였으니 나의 좁은 생각으로는 감히 할 말이 없지만 혹시 빠뜨린 것은 앞으로 족보를 만드는 사람이 바로잡기 바란다.
서기 1896년 병신년
후예 통정대부 전선공감 감역 계순(함성군 16대손) 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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