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자료

함평 이건풍가옥 전남일보 2017.12.29일자 기사

dariaofs 2018. 2. 7. 09:02
3조손 문과급제하고 3대가 향교 전교 역임 '문필가 집안'

김덕진의 종가 이야기 함평 함평이씨 효우공파 만호공 종가


 이명룡, 나산면 초포리 사산마을로
이주 후… 현재까지 종가 이어져와
1759년 식년시 문과급제 관직역임

입력시간 : 2017. 12.29. 15:00



\'함평 이건풍 가옥’의 안채. 남도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 가옥이다.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복원되었다.



함평으로 본관을 고치고 사산(射山)마을에 터를 잡다.

백제 때에 굴내현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굴내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이 함풍현으로 바뀌었다. 함풍현은 고려 때에도 그대로 계속 불리어졌다.


그래서 함풍(咸豊)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도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씨도 있었다. 그런데 이 이씨의 본관이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는 함평(咸平)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태종 때에 단행된 행정구역 개편에 있었다.


함풍현과 모평현을 합쳐서 함평현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씨들은 사라진 함풍을 대신하여 함평으로 본관을 새로이 삼았던 것이다. 이런 성씨들이 이 외에도 더 있기 때문에 별다른 오해가 없길 바란다.

함평이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에 대장군을 지낸 이언(李彦)이라는 분이다. 15세기에 함평군 나산면 우치리에서 태어난 이언의 13세손 이순화(李舜華)라는 분이 효우공파 만호공 종조이다.


군사 지휘관인 만호(萬戶)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만호공'이라고 한 것이다. 선조가 대장군이나 만호를 역임하였으므로 후손들 가운데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계일헌(戒逸軒) 이명룡(李命龍, 1708∼1789) 때에 와서 만호공 후손들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명룡이 우치리에서 나산면 초포리 사산마을로 이주하면서 현재까지 종가를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사산마을에는 2005년에 건립된 '사산(射山) 마을의 유래(由來)'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함평이씨 시조와 현조 6위를 모시는 '사산사(射山祠)'라는 사우가 1790년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조손(祖孫)이 문과에 급제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명룡이 1759년(영조 35)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문인 가문의 길을 열었다.


특히 기주관으로서 궁궐에 있을 때 7서를 강론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강론한 결과 임금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바 있다.


장수하시어 회혼례(결혼한 지 60년)를 치렀고, 80세에 당상관인 통정대부 품계를 받은 후,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평균 연령으로 볼 때 거의 두 사람 몫을 산 셈이다.

그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 있는 자료를 남겼다. 첫째, 일기이다. 과거 급제 때부터 1764년까지의 생활 일기가 남아 있다.


그 일기에는 그의 사소한 일상사뿐만 아니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는 것도 들어 있다.


앞부분이 훼손되어 그 표제를 알 수 없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계일헌일기'라고 명명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99년에 탈초하여 간행한 바 있다.


둘째, 편지이다. 그는 중앙관직을 역임하다가, 나주에 있던 청암역(靑巖驛) 찰방(察訪)을 거쳤다. 그때 받았던 편지가 100여 통 남아 있는데, 교통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일기와 편지는 현재 이명룡의 후손 이호성 님이 소장하고 있다. 이들 자료들이 알기 쉽게 번역되고 세상에 널리 배포되어 지역사 연구에 기여했으면 한다.

이명룡의 손자인 삼회재(三悔齋) 이돈현(李敦賢, 1761~1810), 휴와(休窩) 이돈하(李敦夏, 1770~1834) 등 두 형제가 한 방에서 같이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돈현은 초명이 돈덕(敦德)이어서 사서에는 이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유고(遺稿)가 집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돈하는 형님이 급제한 지 9년 만에 급제하여 가문의 명성을 드높였다.


아무튼 세 조손이 문과에 연이어 합격하였으니,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세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 마을 입구에 '戒逸軒三悔齋休窩三祖孫遺蹟碑'라는 비석을 1996년에, 그리고 '戒逸軒 三悔齋 休窩 三祖孫 遺蹟碑 要約文'이라는 표석을 2000년에 각각 건립하였다.


3대가 함평향교의 전교를 맡다.

그런데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18~19세기에 접어들면 조선의 정치권력이 노론 출신의 서울 양반들에게 집중됨으로써, 전라도를 포함한 지방 지식인들은 원만해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항쟁', '명화적' 등 민중 봉기가 전국 도처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나 항일의병도 그 연장선이었다.


 아무튼 3조손이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중간 자리까지만 올라갔을 뿐 높은 자리나 힘 있는 지방관 한번 못해보았던 것이다.

중앙에서는 큰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함평에서는 이씨들 위세가 대단하였던 것 같다.


이명룡의 6대손 이재형(李載馨, 1853~1905), 7대손 이근행(李謹行, 1898~1964), 8대손 이건풍(1919~2005)은 3대에 걸쳐 함평향교 전교를 역임하였다.


이렇게 3대가 내리 전교를 맡은 사례는 매우 보기 드문 사례이다. 그래서 문중에서도 그 사례를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전교는 보통 그 지역의 최고가는 학자가 맡고, 그 영향력은 좌수(座首, 향청의 최고 직임)와 함께 해당 고을에서 수령 다음가는 편이었다.


이 경향은 개항 이후 또는 해방 이후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종가 문서 속에는 함평 지역의 지리지, 향교지, 삼강록 등의 문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함평 지역사 연구에 긴요한 자료임에 분명하다.

남부 지방에서는 독특한 ㄷ자형 안채, 화재로 훼손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종가 집터는 조선 초기에 잡았으며, 18세기 말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은 '함평 이건풍(李建豊)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1호(2004. 2. 1)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 종가는 안채, 사당,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의 형태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중앙에 2칸 대청을 두었고, 오른쪽으로는 안광과 왼쪽으로는 안방?정지를 두었다.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전통가옥 평면이 대부분 一자형인 데 비하여, 이 가옥은 ㄷ자형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그런데 2015년 화재로 안채 일부가 피해를 입었고 현재는 복원해 놓은 상태이다.


안채 화재 때 귀중한 문서들도 상당수 훼손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필자가 조사할 때 보니, 불에 타다만 문서 또는 소방수에 적셔져서 변형된 문서들도 눈에 띄었다.

현재 종손은 이명룡의 10대손 이규한(李奎翰)이다. 함평향교 전교를 역임하신 그의 할아버지 이건풍은 살아생전에 집안이 가난해도 이웃에게 베풀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은 오래 살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린 손자에게 종손이 돌아갔다. 하지만 현재 종부는 그의 어머니 조여사님이 맡고 있다.

조 종부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집안일, 마을일에 성심성의껏 참여하고 있다. 종부님 말씀에 의하면, 동지날에 안방에 수저 9개를 꽂아 동지죽을 올린 뒤에 집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동지죽 뿌리기를 하였다고 한다.


가양주로 청주를 예전에는 직접 빚었으나 지금을 하지 않고, 대신 매실주ㆍ죽순주ㆍ포도주ㆍ민들레주를 만들어 두었다가 손님에게 대접하고 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생선의 경우 제사 대상자가 좋아하는 생선 위주로 올라간다고 하니, 조상에 대한 배려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종부께서 음식에 관한 다양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활용할 방안이 강구되어야 하겠다.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김덕진의 종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