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여섯 명의 왕이 바뀌는 불안한 정국으로 출발했다. 남쪽에는 정통성을 지닌 다윗 가문이 있었지만 북쪽은 없었던 탓이다. 첫 임금 예로보암은 솔로몬 말기 예언자 아히야의 천거로 등장했다(1열왕 11,37).
학정에 질렸던 민중의 대변자였다가 왕이 된 인물이다. 주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우상숭배에 빠짐으로 그의 왕조는 끝난다. 그분 손길이 떠났기 때문이다. 뒤를 이은 왕들도 금송아지 우상을 철거하지 않았다. 혼란이 계속된 이유다.
혼돈시대 여섯 임금.
①예로보암 아들 나답Nadab. 치세 2년에 살해됨.
②쿠데타로 왕이 된 바아사Baasha. 3번째 왕으로 24년 통치. 금송아지 제거를 미룸.
③아들 엘라Ela가 4번째 왕이 되지만 2년 뒤 살해됨.
④반란의 주인공 지므리Zimri는 7일간의 왕.
⑤그를 죽이고 오므리Omri가 6번째 왕이 됨. 군사령관으로 왕위찬탈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
⑥하지만 또 다른 군의 실세 티브니Tibni도 왕으로 선언.
두 명의 임금이 등장. 양쪽 세력은 4년간 싸운다. 승리한 오므리는 티브니 세력을 제거하고 단독 왕이 된다.
오므리는 12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내정에 힘썼다. 왕위찬탈은 없었고 안정이 찾아왔다. 그의 왕조는 100년간 지속되고 아들 아합Achab과 손자 아하즈야Ahaziah와 요람Jehoram때까지 계속되었다.
왕이 된 오므리는 6년 뒤 수도를 바꾼다. 티르차에서 사마리아로 옮긴 것이다. 기존 세력에 대한 견제였다. 북쪽 최대 성지 스켐에서 북서쪽 11km 지점에 세운 신도시였다. 남쪽 수도 예루살렘과는 68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사마리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열왕기는 사마리아 땅 구매를 이렇게 전한다.
오므리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 세메르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하였다(1열왕 16,24).
구릉지로 평지보다 100m 정도 높았기에 방어에 유리했다. 훗날 아시리아 침공을 받았을 때 사마리아는 3년을 버티며 저항하다 식량부족으로 항복했다. 난공불락 요새였던 것이다.
이후 오므리는 동쪽의 모압을 정복했고 서쪽의 해안 도시와도 동맹을 맺었다. 페니키아의 항구 티로와 시돈은 아합 시대에는 가까운 이웃이 된다.
아합과 정략혼으로 맺어진 이제벨Jezebel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다(1열왕 16,31).
신은근 바오로 신부(마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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