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4.1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dariaofs 2019. 4. 12. 00:53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독성죄가 될지, 혹시라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독성죄가 될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갈팡질팡하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기로 확실히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지 말고 당신이 행하신 하느님의 일을 보라고 하시지만, 이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십니다."(요한 10,40)


그곳은 당신이 세례를 받은 곳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체험의 공간입니다. 그때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당신의 관계를 확실히 규명해 주셨지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을 믿어 주지 않는 상황에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생생히 들었던 선언의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물러가 머무르십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변할 수 없는 게 분명히 존재하지요.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에 대해 자신마저 의혹을 품게 되면, 소위 말해 '지는' 겁니다.


어쩌면 세상은 예수님에게, 그곳에서 당시 겪었던 하느님의 신비스런 계시와 성령의 현존이 자연현상을 동반한 착시나 환청, 망상에 불과하다고 속삭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 안에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가시며 일치 안에서 힘을 얻으셨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외적으로 겪고 계시는 상황을 요한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라고 종합해 서술합니다. 물론 아직 그 전초전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입니다.

독서에는 예레미야에 대한 군중의 음모와 배척이 먼저 나오고, 자기 민족에게 고스란히 당하는 예레미야의 절규가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세 절에 불과한 짧은 기도 안에 불평이나 저주, 절망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지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신"(예레 20,13) 하느님을 찬양하며 노래하라는 기쁨의 환호가 앞질러 등장합니다.


어쩌면 복음 속 예수님도,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루어질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감지하며 찬양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하느님의 부르심을 시작으로 응답해 떠나온 길인데, 어느 지점쯤에서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미 너무 와버려 돌아갈 수도 없는데, 세상은 애초에 첫 시작부터 착각이었다고 속삭입니다.


지금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세상 질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도움을 가장해 길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처럼 부르심의 원체험으로 물러가 머무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영혼 안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물러감은 후퇴도 퇴보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첫 부르심과 응답의 시간적 장소적 현장이 담고 있는 에너지가 우리의 순수와 열정을 되돌리고 더 심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송사를 맡겨"(예레 20,12) 드리고 예수님과 함께 나만의 요르단 강가로 물러가 머무릅니다. 거기서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 다시금 나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직 갈 길은 멀고 여정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드릴 말씀은 오직,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입당송)라는 기도뿐일 겁니다. 나머지는 그분께서 해주실 그분의 몫입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원체험의 시간과 공간으로 한번 돌아가 머물러 보면 어떨까요.


우리 삶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지 않고, 혹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은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면, 남들이 자꾸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들을 한다면, 나와 하느님과의 그 내밀한 만남과 대화의 때로 다시 돌아가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벗님을 그때 확실히 불러주셨습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