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요한 3,2)
바리사이이며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어느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다인 중에서도 탁월한 신분인 바리사이파 일원인데다 최고 의회의 의원이기까지 한 그가 민중 가운데 여느 사람처럼 대낮에 눈에 띄게 예수님을 찾아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직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입장이 정립되지 않은 터라 한 구성원의 방문이 자칫 스캔들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가 움직인 시간, "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살아 온 "이스라엘의 스승" 니코데모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이미 율법에 제시되어 있는 지킬 것들을 충실히 지키는 사이에 본질에 대한 의문이 잠들어 버린 그런 밤과 같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 알고 있습니다."(요한 3,2)
그는 과연 "이스라엘의 스승"(요한 3,10)답게 "안다"는 사실을 전제로 입을 엽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보여준 니코데모의 진실되고 충직한 성정을 이미 알고 있기에, 지금 하는 그의 말이 허세나 위선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그저 본인이 "아는 바"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너는 ... 모른다."(요한 3,8)
그런데 오늘 복음 대목의 말미에는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댓구처럼 등장합니다. 니코데모는 자기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예수님은 그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니, 두 사람 다 틀리지 않는 셈입니다만,
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상대방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니, 이 대화에서 접점을 찾기란 참 어렵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요한 3,3) 하고 예수님은 영의 질서를 말씀하시는데,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배 속에 다시...?"(요한 3,4) 하는 니코데모는 육의 질서에 매여 있습니다.
딱히 예수님에 대해 반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방어적이지도 않은 지도층,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이스라엘의 스승"이 예수님 앞에서 마치 무지한 어린애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영"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등장과 가르침이 당시 지식층에게 파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
"바람"은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숨결을 의미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의 성질은 인간의 한계로는 미처 다 깨달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
계획, 힘을 가리키지요.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열릴 하느님의 나라는 아무래도 세상의 논리, 율법의 논리에 고착된 상태에서는 알아듣기 어렵겠지요.
바람의 자유로운 도래와 방향성, 속도와 리듬을 알 수 있으려면, 존재를 열어 바람을 맞이하는 개방성과,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유연함,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려는 곳으로 기꺼이 떠밀려 갈 수 있는 가벼움이 필요합니다.
이는 어쩌면 자기 존재에서 자아를 비워낸 만큼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1독서의 내용은 석방된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동료들이 한마음 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인데, 그중 다음의 고백에 주목합니다.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사도 4,28)
참으로 놀랍습니다. 스승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어느새 영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더이상 '스승님을 죽인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더 큰 하느님의 그림, 섭리 안에서 그 뜻을 수행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를 깨달은 이상 미움과 증오,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할 수 없는 것이고요. 제자들은 이제 벌어지는 일들을 육의 질서 너머로 볼 줄 아는 영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스승"이 알아듣길 원하셨지만 동문서답만 오갔던 어느 밤의 대화의 완결편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사도 3,31)
바람의 현존으로 지각이 흔들리고 제자들의 내면까지 흔들어 놓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은 영의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곧, 그들은 담대히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다녀간 이후, 그분을 믿지 않는 지도자들에게 용기를 내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요한 7,50-51)
그리고 마침내는 더 큰 용기로 예를 갖추어 그분의 시신을 안장하지요. 니코데모는 분명 단번에 확 변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복음은 그의 변화를 점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결말을 암시합니다.
여전히 밤을 가리키고 있는 듯한 그의 조심성과 주저함, 결단이 유보된 고착은 제자들의 자유롭고 활기찬 "담대함"과 선명히 갈리고 대비되지만,
우리가 모르는 숨은 결말 안에는 그 역시 성령의 자유를 얻어 활짝 피어났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길 바라고 또 믿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물과 성령으로"(요한 3,5) 새로 난 우리는 영의 사람입니다. 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화답송)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도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처럼 주저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갑시다. 우리의 무기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0-17 참조) 아멘. 알렐루야!
오상선 바오로 신부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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