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기 위한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족보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시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그냥 세상에 툭 떨어지 듯 어느날 갑작스레 출현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조건을 그 시작부터 몸소 겪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생물학적, 혈연적 원천과 유대가 필요하겠지요.
하느님께서는 그 준비로 무수한 민족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또 무수한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유다 지파를 택하시어 미리 예수님의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이로써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오리라고 예언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게 되지요(이사 11,1 참조).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타난 족보는, 엄밀히 말하자면 성자 예수님의 족보라기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양아버지 요셉의 족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족보에서 육에 근거하는 인간 제도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겸손을 만납니다. 어느 족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족보 안에서도 그리 정당하거나 반듯할 것 없는 인간사가 얽히고섥힌 가문의 민낯이 있는 그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사가가 족보에 숨김 없이 이름은 넣은 다섯 여인들을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치우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후손 없이 남편을 잃은 뒤, 가문의 대를 잇고자 창녀로 꾸며 시아버지의 아들들을 낳은 타마르(창세 38장 참조),
예리코를 살피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하여 자기와 온 집안의 목숨을 구한 이방인 창녀 라합(여호 2장, 6장 참조),
과부가 된 이방 여인으로서 시어머니의 조언으로 보아즈의 발치를 들치고 누운 룻(룻 3-4장 참조),
자신의 미모를 탐한 다윗 때문에 남편 우리야를 잃고 다윗의 왕비이자 솔로몬의 어머니가 된 밧 세바(2사무 11장 참조),
의롭고 충직한 약혼자 요셉 덕분에 혼인 전 잉태라는 인간적으로 변명할 길 없는 처지에서 목숨을 구하고 신비를 지켜낸 마리아(마태 1,18-25 참조).
그들 중에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그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창녀도 있고, 창녀로 가장해 목적을 이룬 이도 있습니다
과부 신세에서 새 보호자를 얻은 이도 있고, 본의 아니게 남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이도 있습니다. 약혼자의 호의로 처녀 임신이 초래할 죽음을 면한 이도 있고요.
짠~하지 않습니까? 사회적 약자인 여인의 몸으로 세상이 정상이라고 구획 지은 틀에서 곁길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닥뜨린 이들이니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살아보려고,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해 양육함으로써 가문을 잇는 소명을 다하려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해 몸부림친 자취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이들의 역사는 단지 메시아 가문의 역사를 넘어서, 인류의 역사이고 우리와 우리 이웃의 역사입니다.
제1독서는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을 모아놓고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유다에게서 통치권을 지닌 임금이 나오리라는 예언이고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정통성을 이미 고대 이스라엘 시기부터 선조의 입을 통해 계시하신 것입니다.
원죄로 인한 인류의 타락 이후에도 하느님은 이처럼 세상을 위한 구원의 계획에서 손 놓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곧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하늘아 즐거워하여라. 땅아 기뻐하여라. 우리 주님이 오시어 가련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리라"(입당송).
보통 사람들은 족보에서 뭔가 특출나고 위대한 인물을 찾아 내세우려고 합니다. 동일한 유전적 요소가 실제로 몇 퍼센트나 일치할지 몰라도 그 피가 섞였다는, 그런 이들과 한 가문, 한 집안이라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갖고 자신을 치장하려 하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의 족보는 오늘 본 예수님의 족보처럼, 극소수의 뛰어난 인물과, 다수의 평범한 이들, 그리고 수면 아래로 감추어진 "가련한 이들"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며 축복 가운데 거니는 것이 어쩌면 우리 역사 안에 "숨은 가련한 이들"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연민의 사랑이, 자비와 용서가 오늘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정상 범주라고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라도 치열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자기 소명을 채워가는 이들,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받은 생명을 지켜내는 이들,
족보에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부족하고 뒤쳐지고 무너진 이들을 위해서 주님이 오셨고, 그들을 통해서 세상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나는 우리 집안 족보에서 그저 평범한 구성원입니까? 자랑거리나 오명거리입니까? 평범하건 자랑이건 오명이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치열하게 살아낸 모든 자취는 세상 눈에 어떻게 보이든 주님께는 안쓰럽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족보에 들어 있습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 가문에 속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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