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
관상은 특별한 이들만의 전유물?
오늘날 우리가 ‘관상’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가르멜 수도회나 트라피스트 수도회와 같은 봉쇄 수도자들의 몫이고 평신도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나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성인들이나 체험할 수 있는 신비로운 영적 황홀경이나 무아지경 같은 것이 관상이며 이러한 상태는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하느님께서 당신과의 신비로운 만남을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만 허락하시는 걸까? 토마스 머튼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No)!”라고 대답하였다.
서방 교회의 여러 영성가들 역시 관상을 단순히 기이한 현상이나 감정적으로 뜨거워지는 상태라고 표현하지 않았으며, 특별한 신분을 가진 이들만의 전유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사랑이신 주님과의 친밀한 일치 체험
따라서 오늘은 서방 교회의 여러 성인과 영성가들이 관상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살펴보자. 이러한 고찰은 왜 머튼을 서방 교회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종합한 이라고 평가하는가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먼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관상을 “진리를 알아차리어 기쁘고 감탄스럽게 바라봄”이라고 정의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깨닫고 기쁨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하는 길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 안에서 쉬고 있는 마음의 상승”이 관상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쉼’ 혹은 ‘안식’이라는 표현은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을 낳게 하는 신적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직관”이라고 다소 어렵게 관상을 묘사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관상이란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주입된 사랑의 지식이며 동시에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하여 창조주 하느님께 도달할 때까지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 기도에 대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자주 단둘이 지냄으로써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관상은 “사랑하는 하느님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은 상태”라고 표현했다.
13세기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경험하는 관상(觀想)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이라고 보았다.
요컨대 많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공통된 관상에 대한 이해는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의 체험”이다.
사랑과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의 신비를 바라보며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국’ 혹은 ‘하느님 나라’이다.
우리 중에 하느님 나라에 살고 싶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우리 중에 진정한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당신과의 만남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특정 신분의 사람들에게만 유보해 두셨겠는가!
모든 이에게 심어진 관상의 씨앗
「한국 가톨릭 대사전」에서 ‘관상의 보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본성에 참여하여 친밀한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시고 있다.
그 친교의 온전한 형태는 천국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통하여 이루어지나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직관능력의 씨앗을 받게 된다.”
토마스 머튼은 모든 이에게 이미 이 관상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떤 이는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맺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아직 씨앗 그대로 있다고 말한다.
관상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그 씨앗이 싹트기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관상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1967년 12월에 여자 관상 수도회 장상들이 겟세마니 수도원에 모였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 한 수도자가 머튼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머튼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이미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꼭 말해야 합니다.
관상적인 기도는 우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은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머튼의 이 답변은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서 찾지 말고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사랑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 감사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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