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당신 백성에게 배척 당하시는 하느님(예수님), 그래도 백성의 눈높이에 맞추어 응하시는 하느님(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마르 2,3).
중풍 병자는 제 힘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올 수 없었습니다. 몸이 마비되어 말을 듣지 않는 상태니까요. 그의 굳어버린 몸은 예수님을 만나는 데 첫째 걸림돌입니다.
그래도 그는 다행히 좋은 이웃이 있어 예수님 계신 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네 명의 친구가 들것에 그를 싣고 나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 걸림돌이 가로막습니다.
바로 비슷한 지향으로 예수님 앞에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에 몰두하느라 문 앞에 환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습니다.
혹 알고서도 안 비켜주었다면 그들의 마음은 중풍 병자보다 더 완고히 굳어진 것이라 볼 수밖에 없겠지요.
들것을 들고 지붕까지 올라가 환자를 달아 내려보낸 네 명의 친구들 덕분에 중풍 병자는 예수님 발 앞에 놓여집니다. 그들의 기지와 집념이 대단하지요. 평지에서 막힌 길을 하늘을 뚫어 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네 명의 의인은 예수님 앞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치유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기에 이런 수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고, 예수님은 그 믿음을 대견히 보십니다. 그 덕에 중풍 병자는 치유의 선고, 말하자면 완치 판정 선고를 받지요.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 입에서 발설된 "용서"라는 말씀에 율법 학자들이 속으로 발끈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고도 일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당장 뛰쳐 일어나 예수님을 얼싸안고 적극적으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면서 그분 인격과 만나고 싶은데, 지금 분위기로는 어렵겠습니다. 셋째 걸림돌은 제도가 공인하는 지식인들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마르 2,8)
'의아하게 생각하다'는 어쩌면 사뭇 에둘러 완곡하게 표현한 말씀 같습니다. 소위 성경을 좀 안다는 율법 학자들 내면에서는 의혹과 의심과, 불경에 대한 두려움, 분노 등이 부글부글 엉기는 중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질병이 곧 하느님의 징벌이라 여겨졌지요. 그러니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표현은 "얘야, 네 병이 나았다"라는 말과 상이하지 않습니다.
용서 자체가 징벌 상태인 병에서 벗어남을 보증하니까요. 오히려 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누워있는 환자에게 다짜고짜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것보다 훨씬 전인적이고 친절한 말씀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마르 2,11).
그래도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다른 청중이 듣기 편안한 말씀으로 바꾸어 중풍 병자에게 재차 치유 선고를 내리십니다.
눈치만 보던 그는 비로소 예수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마르 2,12) 나갑니다.
들어오기 불가능할 정도로 꽉 막혀있던 군중의 무리는 기적을 체험하고 마음이 한결 유연해진 것일까요? 그가 걸어나갈 길을 열어준 걸 보니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당신 백성에게 배척받으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신 신정 체제로 이어오던 이스라엘이 사람을 임금으로 섬기는 왕정 체제를 만들겠다고 나서자 하느님이 사무엘에게 이르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하느님의 속이 어떠실까 머물러 봅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소외되고 배척 받는 창조주 하느님. 차선으로 물러나 달라는 당당한 요구를 듣고 계시는 하느님.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1사무 8,22).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악"도 허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당신이 주신 자유의지가 크고 값진 선물이기에 악을 선택할망정 지켜주고 싶으신 겁니다.
대신 이제부터 하느님은 그 악으로 인해 허덕이게 될 인간을 구원하실 방도를 마련하실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 손수 지으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존중 방식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누구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니까요. 게다가 이 말씀은 중의적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 당장 중풍 병자의 치유를 통해 알게 해 주시기도 하겠지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앎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를 가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살펴 봅시다. 굳어버린 몸과 마음? 주님 주변을 에워싼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 일일이 자기를 검열하고 단죄하는 내 안의 율법 학자?
반대로 내가 사랑의 치유를 체험하는데 도움이 되는 디딤돌을 떠올려 봅시다. 무거운 나를 끌고 끙끙 땀흘리며 주님께로 가는 이웃들? 당신을 배척하는 요구까지 기꺼이 수용하시는 하느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한 용서를 베푸시는 예수님?
디딤돌을 떠올리면, 오늘 치유받은 중풍 병자처럼 온 존재에 피가 돌고 온기가 차올라 영육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일어나 예수님 말씀대로 걸어 나갑시다. 은총으로 활짝 열리게 된 우리를 보고 세상은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마르 2,11). 네, 주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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