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대목은 길이가 짧지만, "빛", "등불", "드러남", "줌", "받음" 등 성경의 중요한 개념들이 집약되어 있어 여러 방향으로 해석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맥으로 보면 이 대목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서 나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저의 말씀 기도는 "주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라는 복음 환호송의 길잡이에 힘입어 "말씀"의 차원으로 이끌려졌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등불은 속성상 빛을 냅니다. 비록 작지만 불이기도 해서 열기가 없지는 않겠지만 등불을 사용하는 이유는 대개 난방을 위한 열보다는 어둠을 밝히는 빛 때문입니다.
그러니 등불을 밝힌 이상 그 빛은 한 공간을 밝게 채우려는 목적이 분명하지요. 등불을 켜놓고 감추거나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등불을 숨김 수 없듯이 말씀도 숨겨진 채 계시지 못합니다. 빛이 감추어질 수 없듯이 말씀 역시 어느 경로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게 되어 있지요.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말씀을 접하려는 노력, 말씀에 집중하는 주의력, 말씀에 머무르는 시간, 말씀을 품고 삶으로 살아보려는 지향 등 우리가 말씀께 오롯한 정성을 드릴 때, 말씀께서는 반드시 그만큼 되돌려 주시고, 거기에 은총과 축복을 더 보태어 주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좀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말씀은 말씀을 사랑하고 소유하고 깊이 머무를수록 깨달음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신비입니다. 말씀과 깊은 친교로 들어갈수록 하나 더하기 하나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백 배, 천 배의 지혜와 사랑으로 팽창합니다.
반대로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거나 겉으로만 흝는 이들, 말씀에 냉소하는 이들은 말씀을 알아듣던 기억마저 암흑 속에 잠겨버릴 정도로 생경하고 아득한 미혹 속에 갇히게 됩니다.
하느님이, 말씀이 언제 나와 관계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싶게 낯선 이방인이 되어 버립니다. 관계는 두절되고 자신이 굶주리고 헐벗었다는 자각조차 마비된 채 말씀의 진공 상태를 부유하는 불쌍한 영혼이 되고 맙니다.
제1독서는 주 하느님께 올리는 다윗의 감사 기도입니다.
"그러니 이제 주 하느님 당신 종과 그 집안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영원히 변치 않게 하시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시오"(2사무 7,25).
어린 목동을 불러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하느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두고까지 축복을 내리시니 다윗이 이렇게 청합니다. 그 자손들이 하느님을 거부하지 않는 한 하느님 말씀은 영원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 말씀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2사무 7,28).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믿었고 이루어짐을 체험하기까지 한 다윗이 이처럼 고백합니다. 이로써 다윗은 한 인간을 넘어 이스라엘을 대표해 하느님과 관계를 다시금 정립합니다.
또 참되신 하느님의 말씀께서 자손에게까지 대대로 영원히 당신의 효력을 이어가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당신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시어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2사무 7,29).
이는 오늘 기도의 백미가 아닐까 합니다. 결국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주님의 복"이란, 곧 그분 앞에 영원히 있는 것, 즉 주님 앞에 존재하고 머무르는 것임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인간에게는 재물이나 명성, 건강, 권력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머무름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주님 계실 곳, 하느님의 거처, 당신 처소, 길이 쉴 나의 안식처"(화답송).
화답송에서는 다윗에게 거절하셨던 주님의 집을 일컫는 말들이 표현을 바꾸어 나열됩니다. 이 단어들은 가시적 건축물인 성전을 초월하여, 말씀을 받아들여 품는 이들, 말씀에 머무르는 모든 이들까지 포괄해 가리킵니다.
"이곳은 길이 쉴 나의 안식처"(화답송).
사랑하는 벗님! 말씀이 현존하시는 영혼이야말로 주님 앞에 "있는" 축복을 사는 존재이고, 하느님의 거처이며 처소이고 안식처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머무르는 동안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몸을 누이시고 쉬십니다. 우리와 사랑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우리 안에 감추어져 계시는 그분은, 숨어계실 수 없으십니다. 등불은 드러나야 하고 빛은 어둠을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말씀께서 드러나시고, 내가 빛나는 게 아니라 말씀께서 빛나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저 말씀에 머물러 "그분 앞에 있는 축복"을 누리면 그만입니다.
보잘것없는 영혼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말씀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내가 원하였으니 나 여기 머물리라"(화답송).
그러니 벗님! 오늘 감사히 주님을 맞이해 머무릅시다. 그분이 내게 머무르시는지 내가 그분께 머무르는지 분간할 수 없는 건, 그분과 나는 이미 하나인 까닭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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