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dariaofs 2020. 2. 3. 06:11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각각 두 영이 충돌합니다. 복음에서는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과 예수님이 맞대면하고, 제1독서에서는 시므이와 다윗이 만나지요. 꼭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예수님과 다윗이, 더러운 영과 시므이가 겹쳐서 보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5,7)


무덤에 사는 영이 예수님께 외칩니다.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는"(마르 5,5) 그는, 스스로를 해치는 악령에 단단히 붙잡혀 있습니다. 그러니 그 더러운 영에 들린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기에 모두 상관이 있습니다. 유기체 안에서 관계를 거부하는 언사는 단절과 분열을 야기하는 악입니다.

그런데 제1독서에서는 이와 표현은 비슷하나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츠루야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2사무 16,10)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쫒겨가는 다윗에게 사울 집안의 시므이가 악담을 퍼부으며 저주를 하자 다윗의 충신들이 발끈하여 시므이를 치려 합니다. 그때 다윗이 말리며 한 말이지요.

여기서 다윗은 연대성을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의 순환을 끊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더 처참한 복수가 이어지기 마련이니까요. 당장 다윗 자신만 이 모욕을 감수하면 악은 제 힘을 잃고 스러져 버릴 것이니 다윗은 낮추어진 자신을 더 한껏 낮춥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7).


놀랍게도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정확히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나 경외심이 결여된 앎은 사랑을 지향하지 않기에, 누구의 이름을 들먹여도 그의 외침은 공허한 파열음으로 허공에 퍼지다 사라질 뿐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를 제압하십니다. 악령으로 고생하는 이에게는 염려와 연민이 가득하시고, 악에게는 냉정하고 단호하며 매서우십니다.


과연 이 말씀으로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서 나가고, 돼지 이천 마리를 한 번에 몰살시킬 만큼 무시무시한 악령은 떠나갑니다.

"예수님께 저희 고장을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7).


악령에게서 구출된 이를 축하하고 환대하기보다, 구원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께 감사하기보다, 고장 사람들은 재산의 손실이 불편하여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선히 배에 오르시지요. 서운함이나 불쾌함, 괘씸함 같은 감정의 자락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2사무 16,11).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느님의 목소리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면 시므이가 두 차례나 반복해 외친 "살인자"라는 말이 그의 숨은 죄를 들추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군데 감히...' 따위의 오만함은 눈꼽만큼도 비치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사람의 손가락질 아래 놓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판결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영의 충돌을 경험합니다. 더러운 영은 설익은 앎으로 자기를 높이고 선한 영은 하느님 말씀 뒤로 자기를 감춥니다.


더러운 영은 저주의 기회를 즐겨 탐하고 선한 영은 위로와 치유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더러운 영은 스스로를 해치면서 결국 남도 해칩니다. 선한 영은 자신을 죽여 악의 순환 고리를 끊고 남을 살립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혹 우리 안에 악이 있다면, 그 악이 제 길을 찾아 나가도록 명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합시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혹 우리 안에 선이 있다면, 그 선이 퍼져나가도록 당부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