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과 함께 '놀라움'을 체험합니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마르 6,2).
고향 나자렛에 가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고향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예수님의 출신과 과거를 속속들이 아는 그들로서는 예수님이 특출한 가문도, 별다른 배움도 없는 존재인데 하느님의 지혜를 풀어주니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의 놀라움은 못마땅함으로 흐릅니다. 사실 놀라움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예상치 못했던 경이로운 순간을 만났을 때 솟아나는 순수하고 건강한 반응으로,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중립적 가치를 지닙니다.
이 놀라움이 경탄과 찬미, 감사로 흘러 흐뭇하고 대견하고 보람있는 긍정적 감정을 유발하거나, 아니면 선입견과 편견, 질투로 흘러 불신이 더 팽배해지거나 둘 중 하나를 취하면서 나름의 가치를 획득할 겁니다. 오늘 나자렛 주민들은 후자를 택했지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예수님도 놀라십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실망하거나 분노하신 건 아니지요. 그저 놀라셨습니다. 하느님의 경이로운 은총 앞에서 이토록 잽싸게 어둠으로 돌아서는 고향 사람들의 완고함에 놀라신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니 기적도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체험한 이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구원의 원인이고 동력이라고 누차 밝히셨지요. 믿지 않는 이들 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은 서커스나 마술 등 쇼에 불과할 뿐 하느님께 올리는 진정한 경탄과 감사를 낳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성왕 다윗의 또다른 죄를 마주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2사무 24,2).
인구 조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행정인데 왜 그것이 죄가 될까요? 이스라엘은 왕정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신정 체제, 곧 하느님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는 독특한 혼합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 사제의 역할이 중요했지요.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하느님 현존과 그분 능력에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는 뜻도 됩니다. 백성의 수는 곧 병력이니, 이스라엘의 힘은 더 이상 이 백성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라, 백성의 수와 전술과 전투 능력에 달리게 되지요.
놀라기를 거부하고 계산과 예상에 안주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은 변두리로 밀려나 버립니다.
적정한 오차 범위 안에서 기쁠 일도 실망할 일도 없는 데이터 의존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다윗의 죄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에 대해 하느님께 경탄과 경외 드리기를 멈추고 그분을 소외시키는 데 있습니다.
아직 영혼이 완고하고 무디어지지 않았다면 삶 속에는 놀랄 일이 참 많습니다. 사실 삶은 영혼 안으로 신선하게 밀려드는 새로움의 공기를 한껏 들여마시면서 매순간 새로이 하느님께 놀라고 그분 현존에 놀라는 여정의 연속입니다.
경박한 호들갑이 아니라 충만한 설렘입니다. 놀라기를 멈추는 순간 영혼은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박제가 되고 화석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 시편 139,14).
사랑하는 벗님! 오늘 하루, 우리 각자의 생명과 존재에 놀라고,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의 가난함에 놀라고, 그분이 이루신 속량의 부요함에 놀라며 감사하고 찬미드리는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놀라움과 경탄의 삶은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와 맞닥게 하고 관상에로 이끌어 올립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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