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앙 돋 보 기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8. 복음적 삶

dariaofs 2020. 11. 30. 01:51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들”

 

▲ 세상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다. 자코포 토리티, ‘천지의 창조’, 프레스코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8. 복음적 삶 / ① 출발점 하느님의 선

우리가 보는 창조된 세상의 존재는 삼위이시면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하느님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드러내 주며 그분의 어떤 권능과 지혜, 사랑을 계시해 준다. 온 우주에서 가장 탁월하고 뛰어난 예술가이신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작품이 세상이라면, 이 창조된 세상은 그야말로 그 예술가의 얼과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나서,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일그러졌다거나’, ‘무식하다거나’, ‘죄투성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 프란치스칸 복음적 삶의 시작점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당신 사랑과의 심오한 일치를 이루라고 요청하시며 쉼 없이 일하신다. 그분은 우리 존재의 한가운데인 우리의 마음속에서 당신의 지혜를 나누시면서 조명해 주시는 일을 하신다. 우리가 인간 존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나누어 주신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과 선성(善性)을 나누시며 나의 애정 속에서 일하신다. 그분은 세례를 통해 나와 일치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 성이나 타락한 상태보다도 우리 창조의 모형인 선성이 바로 그것이고, 구원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진 더욱더 크나큰 선과 그분의 은총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주어지는 성화가 그 출발점인 것이다.

이 선은 하느님의 근본적인 아름다움이고 이 아름다움이 피조물 모두에게 주어졌다. 특히 하느님 모상 안에서 그분과 닮은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들이다. 인간은 영육으로 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그 반대의 모습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선만이 진정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사실 악은 선의 결핍으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응은 진정한 현실이자 진리인 선을 품고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가르쳐주셨고, 또 인류의 오랜 역사는 이 진리를 계속해서 하느님을 닮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해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와 함께 우리 역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분께서 이미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어떤 곳을 찾아가, 주님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분께서 ‘나’를 취하셨고 그분께서는 이미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또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나의 원의 안에서 성령에 의해 ‘나’는 내적으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작점, 즉 출발점은 늘 하느님과 함께 시작하고 그분의 선과 사랑과 함께 시작한다. ‘나’로부터도 아니고, ‘나의 죄 성’으로부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게 엄청난 위안이 되는 것이고 엄청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해드렸지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인간이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미미한 존재에게도 쩔쩔매며 살아가야 요즘은 더욱더 우리 생명의 주도권을 하느님의 선과 사랑에 찬 섭리로 옮겨 드리는 일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긴급한 요청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만이 하느님이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은총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면서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라는 신성한 춤에 우리는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이끌어가신다는 진리를 우리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삶에 우리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가장 큰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책임을 지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바로 겸손이고 가난인 것이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 근본적인 생명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의 주도권이 사랑이요 자비이며 동정(同情, compassion)이신 창조주 하느님께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4; 마태 10,2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신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9)

우리가 어떤 고통이나 시련,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마저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어야 하는 이유는 모든 선의 원천이요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선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