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베푸는 행위라기보다는 함께하며 나누는 삶
▲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통해 나환우에 자비를 베푼 것이며, 이를 통해 자기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림은 나환우를 돌보는 프란치스코 성인. |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자비가 하는 일과 관련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결과다. 지난 20세기 말에 발간된 프란치스코 시대의 나환우들이 한데 모여 살던 곳에 대한 연구서들을 보면, 그곳 사람들은 나환우뿐 아니라 다른 약한 이들, 병자들, 다양한 방식으로 정상적인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은 ‘수호자(guardian)’를 선출하여 자신들을 이끌게 하였고, 서로 ‘형제들(fratres)’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들도 역시 일반적인 생활 체제를 받아들여 그들의 재산을 공동으로 나누어 썼으며,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사람들이 공동체가 모인 가운데 수호자 앞에서 하느님께 가난과 정결과 순종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들은 거의 준수도자 같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프란치스칸들은 일찍부터 수도원을 ‘집(domus)’이라고 칭했는데, 이들 역시도 자신들의 사는 곳을 그렇게 불렀다. 우리 프란치스칸들 역시도 이들처럼 처음부터 형제들의 거처를 ‘수도원(monastery)’이라 부르지 않고 ‘집’이라고 불러왔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사람들에게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살았고, 또 그들과 삶을 나누면서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자비를 베푸는 행위라기보다는 함께하며 나누는 삶이었다.
실제로 ‘misericordia(자비)’라는 라틴말 단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한 비참함을 향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다. 이 단어는 본래 ‘miseriae’(비참함, 불행, 고통, 불쌍함)와 ‘cor’ 혹은 ‘cordis’(마음)라는 두 단어를 합성한 단어다. 그래서 본래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불쌍함에 대해 마음이 동하여, 이런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들어 높여 주시고 당신의 한없는 사랑 안에 품으시려는 하느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프란치스코가 자기 유언에서 이 단어를 쓰면서 “자신이 나환우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혹은 행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프란치스코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즉 그는 그 자비가 결국 자기가 행하거나 베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를 통해 나환우에 베푼 것이며, 이를 통해 자기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한 바로 후에 그가 나환우들을 통해 받은 자비, 즉 역겨웠던 것이 단맛이 되게 해준 하느님 자비의 은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형제 공동체의 초기 모델 중 하나였다는 점이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프란치스칸 삶(교회 전체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공동체 삶을 포함)에 들어선다는 것은 상처받은 사람들(나환우들)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 프란치스칸 형제 공동체 삶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한계성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바로 우리 형제공동체 삶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 형제 공동체는 물론이고 교회도 자비와 치유가 필요한 나환우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데려다 주신 곳에서 참회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참회의 장소는 물리적인 장소이기도 하지만 교회 안팎과 공동체 내의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성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즉 자매애와 형제애는 참회를 실행하는 프로젝트이다; 이것은 시작할 때 한 번 하는 그런 회개가 아니라 이 삶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발전시켜가고 완성으로 이끌어가야 할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나환우 공동체로서 우리 공동체를 규명하는 것에 대해 탐탁하지 않겠지만, 이것이 실제로, 진실로, 가장 정확한 묘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병상련’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다 건강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픈 것처럼 다른 이들도 아프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같은 마음(同情)을 품어주고 치유하고 싸매주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공동체 상이다. 루카 복음 17장 11절부터 19절에 나오는 나병환자 열 사람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이런 공동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평소에는 적대시하던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 나병으로 인해 같은 공동체 일원이 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개가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정돈된 상황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마 교회도 성직 체계를 거룩한 질서(Holy Order)라고 칭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화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무질서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 안에서 거룩함을 세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무질서를 질서 있게 바꾸시기 위해 노력하신 것이 아니라 무질서와 죄의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당신과 일치하시기를 바라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찌 보면 ‘죄’와 ‘무질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 그분과 일치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 삶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기보다는 죄와 그 죄의 사함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했던 것이 분명한 사실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와 다른 많은 성인이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질서도 사랑해야 하지만 거룩한 무질서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신비주의자 노르위치의 율리안나 성녀도 “죄는 필요하고 유용한 것이다(Sin is behovely)”라고 말한 바 있다. 분명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죄와 어둠마저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완성으로 이끌어가시는 데 활용하시는 참된 선, 선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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