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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4. 삼위일체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dariaofs 2021. 3. 30. 00:49

삼위일체 관계성 안에서 삶과 현존의 의미 깨닫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자기 삶과 현존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림은 조토가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대성당에 그린 프레스코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④삼위일체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노르위치의 율리안나 성인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을 삼위일체 위격 간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혹은 주고받음)에 참여하는 환희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율리안나 성인은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인격이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처럼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관상을 통해 자신의 인격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합치되는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은총의 일치는 결국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존재와의 일치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깨달은 것과 맥이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역시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임을 자신의 유언에서 확신 있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프란치스코가 이런 만남과 깨달음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그에게 그리 엄청난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약한 자로서,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이에게 형제가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어떤 프란치스칸 영성가가 말하기를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위해서나 세상을 향해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존재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세상의 필요에 응하여 회개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자기 삶과 현존의 의미를 깨달아 세상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처럼 다른 이들과 같은 인격체로서 서로 간의 나눔의 춤을 춘 사람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육화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결핍된 세상에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기 위해 오신 갑부 아버지의 아들로 보고자 했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파견되어 육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풍요가 이미 세상 창조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에, 특히 그 모든 피조물의 관계성 안에 들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 위해 온 밝은 빛이었던 것이다.

 

사실 세상은 이미 하느님 사랑과 그 배려로 풍요로운데도 이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을 깨닫지 못했다. 이는 요한복음 서문에서 잘 증언해준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요한 복음 서문에 나오는 이 말씀은 세상 창조와 완성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데 참으로 중요한 진실이다. 성 보나벤투라가 말하듯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이 세상에는 이미 삼위일체의 발자취가 각인되어 있을 만큼 풍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살아내는 데 필연적인 진리이고, 또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 안에서 완성(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 한다.

이 풍요를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삼위일체 하느님 자녀로서의 관계성 안에서의 품위를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물질주의 등으로 스스로 손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하는 ‘나-너(당신)’ 관계성의 단절이 빚어낸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 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오래전에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8,19-23).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군사주의 등이 관계성의 단절을 심각하게 손상하고 있는 현시대의 상황을 내다보고 한 예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을 겪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이 참으로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시듯 ‘생태적 회개’, 곧 우리 서로는 물론이고, 우리 주변의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이 ‘생태적 회개’, 혹은 ‘회복’이라는 말을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대신하자면,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