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느님의 역동적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덕은 하느님의 속성이므로 완덕의 삶을 살아갈 것”을 형제들에게 권고했다. 사진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
9. 삼위일체와 관계성의 영성- ⑤‘기도와 헌신(신심)의 영’과 삼위일체적 삶
프란치스칸 신비주의자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는 ‘헌신의 영’이 악 혹은 죄의 보편적 원인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이라 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을 인용한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22-23)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도 이 ‘헌신(신심)의 영’을 덕을 행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덕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 사랑의 힘을 깨어 인식하며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덕’은 그 자체로 다 하느님 당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에게서도 이런 이해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두 편의 그의 글에 나타난다.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이고, 다른 하나는 ‘덕들에 바치는 인사’이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드리는 영예(덕)들이 거의 고스란히 덕들에 바치는 인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며 사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모든 존재와 연결된 우리 존재의 엄연한 현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는 가운데 이를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통교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만남, 혹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들어서는 것이고, 이러한 삶의 자리로의 초대가 매일 매 순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는 장애물이 늘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나는 물론이고 가까이 있는 이들의 약점과 결점, 이로 인한 서로 간 상처를 주고받음, 우리 정신 안에 뿌리 깊게 고정된 인과응보적 사고방식과 상거래식 계산적 사고방식 등으로 인한 개인들과 집단들, 국가들의 갈등과 전쟁 등등의 어둠이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도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하고 구원하며 역사를 완성해가는 ‘역동적 사랑의 흐름’은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내 존재성’이 아니라 ‘하느님 존재성’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시시각각 의식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적 약함과 현실의 어려움을 넘어서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이런 하느님 섭리에 ‘내어 맡김’과 ‘확신’을 마음 한가운데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2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 집과 거처를 항상 마련해 드립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악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달려갑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먹인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들 가운데 나도 함께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역설이겠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약함과 한계적 상황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일치하여 덕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자극제요 촉매제가 될 수 있고, 또 그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성경 전통의 증거다.
사제가 미사 집전 전에 드리는 기도 중에는 “하느님의 사제여, 지금 드리는 이 미사를 당신의 첫 번째 미사처럼, 당신의 마지막 미사처럼, 당신의 유일한 미사처럼 드리십시오!”라는 기도가 있다.
이 기도에 드러나는 염원에는 하느님 사랑과 그 섭리에 대한 확신과 내어 맡김의 영이 깃들어 있다. 사실 지금 드리는 미사는 어떤 미사이건 사제 자신이 드리는 미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드리시는 미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신자와 사제는 미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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