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항해시대, 선교사들도 동양으로…
원나라 때 최초 전래됐지만 제국 망하며 가톨릭도 소멸
대항해시대 절정에 이르러 선교관할권·예수회 창설로 명나라 말엽 본격 전교 시작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중국 선교 위한 씨앗 뿌려
가톨릭신문은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회장 신의식)로부터 ‘중국교회 역사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받아 이번 호부터 연말까지 총 20회를 연재할 예정이다. ‘중국교회 역사이야기’는 한국교회 역사를 보다 풍성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 경교-중국에 처음 선보인 그리스도교
중국에 처음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교설을 신봉하는 교파로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돼 가톨릭에서 축출됐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시리아를 거쳐 이란 지역에 정착했고 그 후 페르시아, 소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전파됐다.
중국에는 635년 당 태종 때 시리아 수도승 알로펜(중국명 阿羅本)과 선교사 21명이 수도 장안(長安)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경교(景敎), 또는 로마제국을 뜻하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경교(大秦景敎)로 호칭하며 전래 후 200여 년간 상당한 교세를 유지하며 번창했다.
638년에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장안에 대진사(大秦寺)를 세우고, 「일신론」(一神論) 등 한문교리서를 지어 전교했다. 781년에는 거대한 돌비석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세워 중국 경교의 역사와 선교활동을 새길 정도로 왕조의 비호를 받으며 융성했다.
그러나 당 말엽 845년 무종(武宗)의 종교탄압과 농민대반란 황소(黃巢)의 난 때 외래종교인 학살이 자행됨으로써 약 2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 경교도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경교는 정통 가톨릭의 전래에 앞서 중국에 그리스도교 사상을 소개했다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 원나라 몽골인에게 빛이 된 가톨릭교회
원대(元代)에는 가톨릭교회가 최초로 중국전교를 시작했다. 니콜라오 4세 교황은 1289년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몬테코르비노(Montecorvino, 1247~1328)를 중국에 파견했다.
그는 1292년 원의 수도 칸발릭(Kahnbalig 大都, 북경)에 도착해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허락을 받아 성당 두 채를 건립하고, 이어 천주(泉州) 등 다른 도시에도 전교해 1306년까지 5000여 명의 신도를 얻었다. 성공적 전교 보고서를 받은 클레멘스 5세 교황은 1307년 몬테코르비노를 칸발릭 대주교 및 동양 총대주교로 임명하고 그를 보좌할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후 원 제국 쇠망기의 정치적, 사회적 동요와 혼란은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 원 황제의 요청으로 교황이 파견한 마리뇰리(Marignolli)는 1342년 부임했다가 1347년 본국으로 떠난 마지막 선교사가 됐다.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며 가톨릭은 소멸돼 명말 마태오 리치가 중국에 입국했을 때에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포르투갈 리스본 테주 강변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시작한 자리에 포르투갈 항해 왕자 엔리케 서거 500주년을 기념해 1960년에 건립한 높이 53m의 기념비. 항해 중인 범선 모양의 이 기념비에는 많은 인물상이 조각돼 있는데 맨 앞 뱃머리에 서 있는 인물이 앤리케 왕자, 그 뒤를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 탐험가, 천문학자, 선교사들이 따르고 있다.
인도 고아(Goa)의 봄 지저스(Bom Jesus)성당에 안치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부패하지 않는 시신. 1552년 12월 3일 풍토병으로 중국 상천도에서 선종 후 말라카를 거쳐 고아로 옮겨졌는데 시신이 전혀 손상되지 않아 기적의 표징으로 여긴다.
■ 가톨릭이 천주교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근대 가톨릭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명나라 말엽 중국에 전래돼 드디어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름으로 동아시아에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공의 전제가 되는 3대 요인으로는 ▲대항해시대의 도래, ▲선교관할권 제정, ▲예수회 창설을 들 수 있다.
대항해시대는 포르투갈 왕자 엔리케(Henrique, 1394~1460)가 사그레스(Sagres)에 지리연구소와 항해학교 설립, 탐험대 재정 지원 등 ‘지리상의 발견’의 기틀을 마련하며 시작됐다.
이후 바르톨로메오 디아스의 희망봉,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로,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 및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가 이뤄지며 대항해시대는 15세기 말, 16세기 초 절정에 도달했다.
수많은 유명, 무명 탐험가들이 개척한 항로를 따라 상인들이 주로 향신료무역 특히 후추 수입으로 큰 이익을 거두려고 동양으로 갔으며, 이들 탐험가와 상인에 편승한 제3그룹이 그리스도교의 동양전교를 꿈꾼 선교사들이었다.
선교관할권(Padroado)은 가톨릭교회가 대항해시대 선두주자인 포르투갈과 스페인 국왕의 식민지 개척 독점권을 인정해 주며, 그 지역 선교활동에 관한 권한과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권한은 선교사 선발과 배치, 식민지에서의 교회 설립, 십일조 징수 등이고, 대신 국왕은 선교비용 보조, 선교사 파견 등의 의무를 지는 것이다.
1493년 알렉산델 6세 교황은 대교서(大敎書)로 포르투갈에게 남미의 브라질 및 대서양 동쪽의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스페인에게 대서양 서쪽 필리핀군도, 북아메리카와 남미 대부분을 식민지로 개척해 보호할 선교관할권을 주었다.
이후 교황청은 1534년 포르투갈 식민지 인도 고아(Goa)에 동아시아선교 총괄 총주교구를 설립하고, 1576년에는 포르투갈이 1553년에 중국 명나라로부터 빌린 조차지(租借地) 마카오에 중국, 일본, 베트남 등지의 교무를 관장할 교구를 설립했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해양 진출은 선교관할권에 의해 중국을 향하고, 이후 예수회가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액션에 지원자 역할을 맡게 됐다.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점화된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은 신교에 큰 지역과 많은 신도를 잃었다. 이 때 가톨릭의 젊은 기수를 자처하며 종교개혁에 대항하는 반동(反動)의 기치를 올린 예수회(Jesuit)는 1534년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와 여섯 동료들이 파리 근교 몽마르트르 언덕 위 순교자성당에서 창립을 선포한 후 1540년 교황의 승인을 받은 수도회다.
예수회는 유럽에서 상실한 가톨릭 신앙 영역의 회복이 우선 목표였으므로 포르투갈 왕 조앙(João) 3세의 요청에 따라 인도 고아를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펼칠 것을 결의했는데 그 소명을 받든 이가 바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方濟各沙勿略, 1506~1552)다.
■ 중국교회를 위한 한 알의 밀알-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하비에르는 바오로 3세 교황으로부터 교황특사 자격을 부여받고 1541년 4월 포르투갈 리스본 항구를 떠나 1542년 5월 고아에 착륙해 동인도 지역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545년부터는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 실론, 뉴기니 지역들을 돌며 선교 영역을 넓혀갔는데, 1547년 말라카에서 일본인 야지로(弥次郞)와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가고시마(鹿兒島) 무사(武士) 야지로는 사람을 죽인 후 포르투갈 상인의 도움으로 일본을 탈출, 말라카에 도피 중이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를 고아로 데려가 세례를 주었는데, 그를 통해 알게 된 일본은 큰 가능성을 지닌 선교지였다.
그리하여 1549년 4월 일본 개교를 위해 두 명의 예수회원을 대동하고 고아를 출발, 8월 15일 야지로의 안내로 그의 고향 가고시마로 입국해 이후 2년 3개월간 가고시마, 히라도(平戶), 야마구찌(山口), 교토(京都), 붕고(豊後) 등 주로 규슈(九州)와 혼슈(本州) 서부지역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이 일본 전교 여정은 하비에르가 중국이라는 나라의 위상과 의미를 새삼 깨치는 계기가 됐다. 중국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구심적 존재이며 역사와 문화의 표본으로 우러르는 대상이라는 것, 따라서 만약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수용ㆍ공인된다면 일본은 물론 중국문화권에 속한 모든 나라들이 가톨릭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하비에르는 중국 개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551년 11월 일본을 떠나 고아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4월 예수회 선교사 세 명만을 대동하고 중국을 향해 출발, 8월에 광동성(廣東省) 밖 상천도(上川島)에 도착해 중국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은 명나라 초기 정화(鄭和)의 제7차 항해 이후 쇄국을 고수했으므로 입국에 실패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던 중 1552년 12월 3일 풍토병으로 상천도에서 선종했다.
46세로 생을 마감한 하비에르는 그 사이 로마의 예수회 장상과 포르투갈 국왕에게 많은 서간을 보내 중국 개교의 당위성을 역설함으로써 한 알의 밀알이 됐다. 가톨릭의 중국전교는 하비에르 선종 30년 후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에 의해 실현됐는데, 이것이 17세기 이후 수많은 공적·사적 시련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존속하는 중국 천주교회 역사의 시작이다.
장정란(베로니카) 교수
장정란 교수는 역사학 전공 문학박사로 세부 전공은 동서문화교류사이다. 오랫동안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교수, 동국대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후학을 양성했으며 현재 한국교회사 아카데미 교수와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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