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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5) 독일 아담 샬 신부와 조선 소현세자의 만남

dariaofs 2021. 6. 10. 00:26

독일 사제와 조선 세자의 우정, ‘조선 개교’ 희망 쌓다

‘중국 천주교회 제2 창설자’ 독일 출신 아담 샬 신부 청나라에서 8년간 체류했던 소현세자와 두터운 친분
조선 땅에 천주교 전파 위해 선교사 파견 물색 등 노력
끝내 목표 이루지 못했지만 한국교회 역사의 서장 열어

 

청나라 흠천감감정 복색을 한 아담 샬 초상. 보헤미아 출신 동판화가 벤첼 홀라(Wenzel Hollar, 1607~1677) 작품으로 홀라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테우스 메리안(Matthäus Merian)에게 사사 후 아담 샬의 고향 쾰른에서도 활동했다.장정란 교수 제공

 

16세기 말 중국에 가톨릭을 ‘천주교’로 뿌리내리게 한 예수회 선교단은 우선 중국 교화, 그 다음 동일문화권의 다른 나라 개교(改敎)를 전교계획의 큰 밑그림으로 그렸는데, 최우선 후보국이 조선이었다. 1644년은 명(明)나라가 멸망하고 청(淸)나라가 만주 심양(瀋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해다.

이때 독일인 아담 샬 신부와 조선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꽃피우는 드라마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소현세자의 서양학문과 천주교에 대한 관심과 호감, 그리고 세자라는 위상 때문에도 조선 개교의 희망에 가슴 설레었을 서양선교사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 아담 샬·소현세자는 누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2~1666)은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다. 1622년 중국에 입국해 선종 때까지 명·청 왕조에서 각각 22년, 총 44년 동안 전교했다. 왕조교체기 축출 위기의 교회를 존속시켜서 마테오 리치에 이은 ‘중국 천주교회 제2 창설자’로 일컫는다.

또한 뛰어난 과학자인 그는 명나라 예부상서 서광계(徐光啓)의 천거로 역법개정에 참여하고 방대한 천문학총서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했으며, 청나라 최초의 흠천감감정(欽天監監正, 천문대장)에 취임해 20년간 재직했다. 이 같은 공훈들은 그를 중국 역사상 정일품(正一品) 품계를 받은 유일한 서양인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로 13세에 세자로 책봉됐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 때 조선이 만주족 청나라에 패배하면서 1637년 1월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 8년 동안 인질로 잡혀 있었다.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야 하는 어려움 중에도 소현세자는 청의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고국을 위해 유용한 도움을 받고, 조선인 전쟁포로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 심양 인근에 조성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 세자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충실한 삶을 영위했다.



소현세자가 1645년 귀국 때 갖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 흰 대리석 서양식 평면해시계로 세로 57.5㎝, 가로 119.5㎝, 두께 16.5㎝, 무게 310㎏이다. 본체에 ‘崇禎九年歲次丙子日躔 欽定修督陪臣湯若望羅雅谷’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1636년 아담 샬과 로(Rho, 중국명 羅雅谷) 신부가 고안·제조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839호.장정란 교수 제공



■ 북경에서의 만남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더 이상 인질이 필요 없어진 청나라는 소현세자의 환국을 허용했고 청 황제에게 귀국 인사차 갔던 북경에서 아담 샬을 만난 것이다.

소현세자는 1644년 9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북경에 체류했다. 그동안 소현세자와 아담 샬은 수차례 서로 왕래하며 교분을 쌓았는데 이 사실을 아담 샬은 그의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Narratio」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회고록에 의하면 첫 만남은 소현세자의 요청으로 아담 샬 주거지 즉 남천주당(南堂)에서 이뤄졌다. 세자는 ‘매우 정중히’ 아담 샬을 방문했고, 또한 체류 숙소에 ‘역시 정중히’ 아담 샬을 손님으로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회동 때마다 서양학문과 천주교에 대해 긴 한문필담을 나눴다.

특히 세자가 중국의 역학(曆學)을 좀 더 익히도록 데려온 조선의 역관(曆官) 몇 명을 아담 샬은 기꺼이 도왔는데 세자 못지않게 그들과도 우의가 두터워져서 역관들은 귀국 무렵 사은의 정표로 적지 않은 선물을 아담 샬에게 주었을 뿐 아니라 눈물까지 흘렸다.

귀국일이 다가오자 소현세자는 감사의 표시로 아담 샬에게 여러 값진 선물을 했으며, 아담 샬도 답례로 자신의 저서와 천문역서 등 한문서학서,

천구의(天球儀), 구세주상 등을 선물했다. 이에 대해 소현세자는 친필로 감사의 편지를 보내, 아담 샬의 선물이 대단히 큰 기쁨을 주었다는 것, 특히 종교서는 인간의 정신수양과 덕성고양에 적합한 가르침을 싣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구세주상은 위대한 존엄성으로 보는 사람의 심성을 감동시켜 감정을 순화시킨다는 것, 천구의와 학술서적들은 필요불가결한 것인데 조선에도 유사한 것은 이미 있으나 오류가 많으므로 귀국하면 받은 서적들을 인쇄해서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것,

그러나 구세주상은 도로 돌려보내고 싶은데 조선에는 아직 천주교가 전교되지 않아서 구세주상이 모독될 우려 때문임을 밝혔다.

아담 샬 자신은 구세주상을 돌려보내겠다는 것이 예절을 지키기 위한 조선식 인사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 답신을 통해 구세주상을 계속 보유할 것을 청하며, 소현세자의 태감(太監, 환관) 중에 이미 영세한 자가 한 명 있으니 그에게 계속 교리를 학습시켜 조선에 천주교를 전교하게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그의 두 번째 편지로 구세주상은 기쁘게 보유하겠으며, 태감의 교리학습보다는 차라리 선교사를 한 명 대동하고 귀국해 그 자신과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아담 샬은 선교사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소현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담 샬과 작별 후 귀국했다. 서양식 평면해시계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 보물 제839호)도 소현세자가 귀국 때 갖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아담 샬은 회고록에서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면서,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면서 “그 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육로로, 해로로 조선에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모두 허사였다”고 소현세자와의 만남에 관한 기록을 끝맺고 있다.

■ 에필로그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26일 북경을 떠나 1645년 1월 18일 한양에 도착했으나 귀국 석 달 만인 4월 26일 급사했다. 아담 샬은 1664년까지 흠천감감정으로 재직했다.

그는 관직 수행 중에도 조선전교에 진력해,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에게 조선 관련 상세정보를 제공하고 조선 입국에 필요한 공식서류도 준비해 줬다. 또한 예수회 장상에게도 조선 입국이 용이한 심양에 우선 새로운 교구를 열자는 제안을 했다.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소중한 만남은 조선개교로 이어지지 못했다. 피상적 실패 원인으로는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후 이어진 조선의 폐쇄적 상황,

그리고 절대 부족했던 중국 내 선교인력 등 전교여건 미비를 들 수 있다. 만약 모든 외적 조건이 갖춰졌다면, 천주교는 150여 년 앞당겨 우리나라에 전교되고 서구문명 또한 순조롭게 도입됐을 가능성도 커서 그 역사적 의미와 영향은 획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록 당시 가시적 성과는 없었으나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만남 10년 후인 1654년, 조선이 시헌력(時憲曆, 아담 샬이 만든 것으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해 만든 역법)을 시행하며 서양역법을 채택했다는 것은 동서교류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아담 샬의 전교 노력 역시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서장을 열게 한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소현세자는 마치 이를 예견한 듯 아담 샬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저희 두 사람은 출신국이 다를 뿐 아니라 대양이 가로놓여 매우 멀리 떨어진 땅에서 각기 태어났건만 이 외국 땅에서 상면한 이래 마치 혈연으로 맺어진 것처럼 상호 경애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인간 본성 속에 숨겨진 어떤 힘이 작용해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매우 먼 땅에서 서로 떨어져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은 학문으로 합치될 수 있다는 사실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아담 샬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Narratio」 중 소현세자 관련 기록 부분. “이 무렵 조선 왕자가 석방돼 북경에 왔다. 만주인들이 전에 조선 왕국을 점령하고 왕자를 붙잡아 요동으로 데려오면서 자기들이 중국을 정복하면 즉각 석방하겠노라고 약속했었다”로 시작하고 있다.장정란 교수 제공



장정란(베로니카) 한국교회사 아카데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