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천주교 귀의’ 끝내 이루지 못한 전교 목표
아시아 각국 천주교 전파에 ‘중국 황제의 세례’는 큰 의미
선교사들 각별한 노력 기울여
황제와 개인적인 친분 나누고 과학·예술 교류에 힘썼지만 목표 실현에는 현실적 한계
그리스도교를 중국에 ‘천주교’로 뿌리내리게 한 예수회 선교단은 전교활동의 전제를 그 사회에 융합, 동화로 인식하며 철저한 적응주의로 중국 개교(改敎)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선교사들은 중국 사대부(士大夫) 지식층에게 서양 학문과 기술을 소개, 전달함으로써 친교를 맺고 전교했다. 전교의 궁극 목표는 바로 황제였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초상. 왕조 부흥을 위해 서양선교사들을 중용하는 등 개혁정치를 시도했으나 북경이 농민반란군에게 함락되자 자금성 뒤 경산(景山)에서 목숨을 끊었다.장정란 교수 제공
■ 중국 전교 최종 목표-황제의 세례
예수회는 궁극적으로는 황제를 천주교에 귀의시키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선교사들이 사대부 계층을 중시한 것은 종교적, 실질적 의도 때문이다.
중국 관료체제 하에서 모든 관직을 도맡는 사대부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했으므로 전교의 성공과 영속을 위해 이 계층의 교화는 필수였다.
더욱이 지역사회에서 유교윤리를 스스로 실현하며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들이 단 한 명만 개종해도 그 파급력은 실로 가늠할 수 없이 컸기 때문인데, 중국 천주교의 주석(柱石) 서광계(徐光啓)와 상해지역의 전교 정황이 그 대표적 예다.
그러나 혹시 입교하지 않더라도 사대부와의 친교를 통해 조성된 천주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사대부의 정치적, 사회적 힘으로 아직 미약한 교회를 박해와 축출 위험에서 지켜줄 것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황제가 자리했다.
즉 선교단의 최종 전교목표는 황제였으며, 유구한 중국왕조의 절대적 존재인 황제의 천주교 귀의란 제국 전체는 물론 중국문화권에 속한 이웃나라들, 곧 조선, 일본, 월남(베트남)까지도 쉽게 개종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 황제의 선교사 인식
중국황제의 선교사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명·청 왕조가 동일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선교사들이 높은 학식과 과학기술, 특히 천문역법(天文曆法) 분야의 전문가라는 데 있었으며 종교인이라는 개념은 옅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서양신문물 전달자라는 위상 확립조차 선교사들이 헌신적으로 조정에 봉사했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중국 입국이나 황제가 있는 북경 진입조차 대단히 어려웠는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는 중국 도착 후 북경 정착까지 18년이 걸렸고, 황제 접근은 불가능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잘 알려준다.
청나라 순치제 초상. 아담 샬을 믿고 따르며 천주교에도 관심과 호의가 컸으나 23세에 홍역으로 요절했다. 황제는 아담 샬에게 회복 후 영세를 결정하겠다고 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장정란 교수 제공
자명종(自鳴鐘, 서양시계), 프리즘, 세계지도, 대서양금(大西洋琴, 피아노의 전신) 등 각종 진기한 서양물품 진상 후, 자명종에 열광해 시계수리공 명목으로 리치의 북경 체류를 허락한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2~1620), 만주족 방어 목적으로 서양식 대포주조를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 1592~1666)에게 명하고 역법개정을 위해 역국(曆局)을 신설해 선교사들을 중용한 숭정제(崇禎帝, 재위 1627~ 1644) 치하에서도 선교사들은 명(明) 황제 대면조차 이룰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중국황제와 개인적 교분을 맺기 시작한 것은 청대(淸代)부터다. 청 황제들이 선교사를 명 황제들과는 다르게 인식했던 이유는, 한족(漢族)이 아니라도 문화민족이면 중화담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상정책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외래인이기에 서구인에게 덜 냉담했던 것이다. 아울러 조언자, 새로운 지식전달자, 기술전문가 능력을 갖춘 선교사의 실질적 유용성이 새 왕조를 건립한 만주족(滿洲族) 황제에게 그들을 인정하고 예우하며, 개인적 친교를 유지시킨 근본 원인이었다.
청 황제와 선교사들의 교분은 순치제(順治帝, 재위 1644~1661)를 필두로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1~1722),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5) 등으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현상은 이들의 교유가 사사롭고 개별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특히 순치제와 아담 샬, 강희제와 페르비스트(F. Verbiest, 南懷仁, 1623~1688), 건륭제와 카스틸리오네(J. Castiglione, 郞世寧, 1688~1766)가 국적, 나이, 지위를 초월해 아름답고 감동적인 인간관계를 펼쳐 보인다.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청나라 건륭제 초상. 정통어진(御眞) 회화기법을 따랐으나 세밀한 사실적 표현이 돋보인다.장정란 교수 제공
■ 황제와 선교사-그 인간적 교유
황제와 선교사의 인간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순치제와 아담 샬이 열었다. 청의 북경 입성 직후부터 맡은 공직이 군신관계를 뛰어넘어 황제와의 개인적 교분으로 발전한 것이다. 순치제는 아담 샬을 만주어로 존경하는 할아버지라는 뜻의 ‘마파’(瑪法)라고 불러 지대한 신뢰를 보였다.
황제의 신하 방문은 통상적 관례가 아닌데도 순치제는 1656년과 1657년 두 해 동안에만 아담 샬 사저 남천주당을 24회나 방문했다. 미사 포도주가 신기하고 맛있어 매번 마시려 하고, 성화·성물·천주교 교리에 대해 질문했으며, 아담 샬 침대에 누워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묻듯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지혜를 구했다.
순치제가 임종을 앞두고 적합한 후계자를 아담 샬에게 자문했을 때, 아담 샬은 이미 강희제의 자질을 간파했기에 강희제가 홍역을 이겨냈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천거해서 황제 위에 오르게 했다. 역대 어느 황제보다 학문을 좋아하고 서양문화와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남달랐던 강희제는 한밤중 자정을 넘긴 시각에도 종종 페르비스트를 궁중에 불러 개인학습을 받았다. 페르비스트에게 외교자문 역할을 위임하고 흠천감에 중용했음은 물론이다.
청대 최고 번영기를 누린 건륭제는 특히 문화, 예술, 여행을 즐긴 황제다. 그는 카스틸리오네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아예 자금성에 거주시켜 자신을 모델로 기록화를 그리게 했고, 순행이나 심지어 전쟁터에까지 동반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을 본뜬 원명원(圓明園) 설계와 시공을 주도하도록 해서 회화와 건축분야에 18세기 중국과 서양의 혼합양식을 창조했다.
몇몇 선교사를 예로 들었지만 여타 모든 선교사들 역시 혼신을 바쳐 황제와 조정에 봉사했으며, 황제들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노동과 헌신에 상응하는 정신적, 물질적 대가를 흔쾌히 지불했음은 물론이다. 명·청조를 막론하고 교회와 선교사에게 내린 황제의 편액(扁額, 친필 액자), 명예존칭, 관작, 교회 건립부지와 장지, 선교사 장례비용 등이 그 증좌라 하겠다.
자금성 종표관(鐘表館)의 자명종. 서양시계 자명종은 명·청 황제들이 가장 선호하던 물품이어서 선교사들은 중국 입국 때 반드시 갖고 와 선물했다.장정란 교수 제공
북경 고관상대(흠천감) 천문기기. 아담 샬이 흠천감 감정에 취임한 후 북경 흠천감에서는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 관원들을 중심으로 시헌력 제정, 천문역서 편찬, 서양천문기기 제작 등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장정란 교수 제공
■ 중국황제의 세례는 가능했을까?
그렇다면 중국황제는 과연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중국에는 유럽사회에서 볼 수 있는 국가와 교회, 정치권력과 교회세력이라는 이원성(二元性, Dualismus)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독일 역사학자 볼프강 프랑케(W. Franke)의 논리가 해답을 제시한다. 중국황제는 정치적으로 국가권력의 정점이며 동시에 천자(天子)라는 명칭이 상징하듯 천제(天帝)의 권리대행자로서 정신적 구심점이기도 하다. 즉 중국의 창조주 개념인 천(天) 혹은 천제 또는 상제(上帝)가 자신의 피조물을 직접 다스릴 수 없으니 대신 천명(天命)으로 천자를 보냈는데 그가 황제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제국의 정신적, 실체적 상징인 황제가 어느 외래종교에 투신해 그 조직에 속하거나 그 종교의 수장에게 심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선교사에게 보인 관심과 호의는 그들이 소유한 학식과 인간성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소속된 종교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황제를 천주교에 귀의시키고자 했던 선교사들의 간절한 소망과 시도는 실제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다.
장정란(베로니카) 한국교회사 아카데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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