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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8) 첫 중국인 사제이자 주교 - 나문조(羅文藻)

dariaofs 2021. 7. 26. 00:54

선교사 추방되던 어려운 시기에 중국 선교 도맡아

도미니코회 입회 후 사제품
필리핀-중국 오가며 선교활동
화합과 성실함 통해 큰 성과
남경교구장 주교 된 이후 중국인 성직자 필요성 강조
선교 관할 지역이던 조선에 선교사 파견 꿈 꾸기도

 

대만 가오슝(高雄)에 있는 문조외국어대학에 세워진 나문조 동상. 문조외국어대학은 나문조의 이름을 따서 1966년 우르슬라수녀회가 설립했다.조한건 신부 제공

 

나문조(羅文藻, Gregorius Lopez, 1616~1691)는 중국인 최초의 사제이면서 최초의 주교이기도 하다. 나문조의 생애는 한 개인의 역사를 넘어 중국 천주교회 역사의 한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문조는 자신의 선교 관할 지역이었던 조선에 선교사 파견의 꿈을 꾸기도 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나문조가 걸어갔던 신앙의 길을 살펴본다.

■ 중국인 최초로 도미니코 수도회원이 되다

나문조는 의례논쟁의 돌풍을 일으킨 지역인 복건성(福建省) 복안현(福安縣)의 작은 마을 나가항(羅家巷)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는 불교 신자였으므로 어릴 때 불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던 그는 의례논쟁의 논란을 일으킨 프란치스코회 이탈리아 선교사인 카발레로(Antonio de Santa Maria Caballero, 利安當) 신부에게서 1634년에 그레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다.

당시 복안(福安) 지역은 반 그리스도교 운동, 해적의 출몰 등으로 신앙생활이 어려웠던 때였다. 카발레로 신부를 보좌하며 선교활동을 돕던 나문조는 국경 밖으로 쫓겨나기도 하고,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특히 1637년 카발레로 신부는 예수회의 적응주의 전교방침이 잘못됐음을 밝히려고 로마행을 결심했으나, 돌연 취소하고 북경으로 올라가 아담 샬을 만나 조선 전교에 대해 담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 나문조는 카발레로 신부와 아담 샬의 만남에 동행했다. 북경에서 아담 샬은 중국인인 그를 중시했고, 그를 통해 조선 전교를 실천에 옮기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 명(明) 조정이 천주교를 금지함으로 인해 나문조는 수감됐다가 풀려난 후 다시 복건성 복안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는 복안에도 박해가 있어 마카오로 추방됐다.

1644년 나문조는 마카오에 있던 글라라회 수녀들이 마닐라로 갈 때 동행하면서 필리핀으로 건너가 성 토마스 대학에서 공부하게 됐고, 거기서 로페즈(Lopez)라는 스페인식 이름을 얻게 됐다.

신학원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면서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소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과 현재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편지와 자금을 보낼 수 있겠는지에 대한 테스트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문조는 다시 중국으로 보내져 선교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를 위해 중국 복안(福安) 등두촌(藤頭村)에 도착한 나문조는 그곳에서 성당 건축과 열정적인 복음 전파와 선교의 소임을 수행함으로써 복안에서 입회가 허락됐다. 이후 그는 성직교육을 받기 위해 다시 마닐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정식으로 입회했다.

■ 중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다

그는 도미니코 수도회 입회 후 성 토마스 대학에서 계속 학업을 이어갔고, 마침내 1654년에 마닐라 포벨토(Pobelto, 중국명 鮑布來德) 대주교로부터 중국인으로는 최초로 사제품을 받게 됐다.

마닐라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4명의 선교사들 즉 라이문도(Raimundo, 賴夢多), 리치(Vittorio Ricci, 利齊), 코로나도(Domenico Coronado, 高勞拉刀), 로드리게스(Diego Rodriguez, 勞特力士)와 함께 중국으로 파견됐다.

 

현지의 풍속과 문화를 잘 알고 있는 나문조는 함께 파견된 동료 신부들에게 많은 도움을 줌과 동시에 신자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했다.

증언에 따르면 그의 강론에는 힘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2년 동안 중국의 10개 성을 두루 다니며 2000여 명에게 세례를 줬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그 지역의 반천주교 운동으로 말미암아 외국인 선교사들이 감금돼 있었으므로, 나 신부는 중국인 선교사제로서 홀로 선교활동을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

 

나문조 주교수품 300주년을 기념으로 1985년 4월 간행된 짧은 전기 「羅文藻小史」(나문조소사).

 

■ 최초의 중국인 주교가 되다

1659~1665년 사이에 양광선(楊光先)이 일으킨 역옥(曆獄, 역법 정책과 관련된 옥사) 사건으로 인해 아담 샬 신부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감금되거나 추방을 당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나문조의 활약은 돋보였다. 수차례 마닐라와 광주를 오가면서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예수회의 경비를 조달해 줬고, 거의 중국 전역의 전교를 담당했다. 나문조는 두 해 동안 3000여 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러한 활동은 도미니코회 나바레테(Navarette) 신부를 통해 파리 외방 전교회 창립자 중 한 명인 팔뤼(Pallu) 주교에게 알려졌고, 이에 팔뤼는 포교성성에 나문조를 남경대목구장으로 천거했다. 클레멘스 10세 교황은 이를 비준해 1674년에 나문조 신부를 남경대목구장으로 임명하고 중국의 5개 성과 조선을 담당하게 했다.

도미니코회 나바레테 신부와 부총장은 모두 나문조가 주교품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고 포교성성에 증언했지만, 필리핀 도미니코회 지부장인 칼데론(Antonius Claderon) 신부는 이에 반대해 나문조가 주교품을 수락하면, 그를 회원에서 제명시키고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소환하며 재정적인 지원도 끊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나문조에게 마닐라 거주 중국인들에 대해서만 전교할 것을 명하며,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칼데론 신부가 나문조의 주교품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중국의례 문제에 있어서 도미니코회 노선이 아니라 예수회 적응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수도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나문조는 마닐라에서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1679년에 다시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은 교서를 반포해 그를 남경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뒤늦게 임명장을 받고, 주교로 처음 선임된 지 11년 만인 1685년 4월 8일에 그는 광주에서 프란치스코회 델라 키에사(Della―Chiesa)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 중국인 사제 양성의 필요성과 화합을 강조하다

대목구장이 된 나문조 주교는 1688년에는 남경에서 중국인 만기연(萬其淵), 오력(吳歷), 유온덕(劉蘊德) 3명에 대한 사제서품식을 집전했다.

1690년에는 알렉산델 8세 교황에 의해 남경과 북경이 교구로 나눠지자, 남경교구의 초대 교구장 주교가 됐다.

남경교구장이 된 후 나문조 주교는 교황청에 라틴어에 대한 엄격한 규율에 관면을 청하면서, 중국인과 동아시아인들이 사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히려고 했다.

나 주교는 기력이 점점 약해지자 후임 주교에 대해 고민을 했는데, 당시 동아시아 선교에는 포르투갈 관할권(Padroado)이 작용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잘 조정하면서도 중국의 문화와 풍속, 언어를 알고 있는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출신 레오네사(Leonessa, 余) 신부를 지명해 교황에게 추천했다.

남경교구의 상황에 따라 ‘출신지, 포교성성과의 관계, 선교사들간의 관계’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자신의 후임을 물색한 것이다.

나 주교는 중국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선교 관할 지역인 조선과 타타르(韃靼) 지역에 선교사가 들어가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중국천주교회의 첫 번째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자이며, 사제이고, 주교였던 나문조 그레고리오는 최초라는 수식어의 압박에서 벗어나 1691년 7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혼돈의 시간 동안 멋진 선교 성과를 이뤄낸 나문조 주교의 힘은 화합과 성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오늘의 중국교회를 바라보면서 화합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 나문조 주교는 교회일치와 화합의 모범이 될 것이다.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