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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0) 서양 과학기술의 중국 전래

dariaofs 2021. 8. 24. 00:28

최신 수학·천문학 전해졌지만 ‘중화주의’ 높은 벽 가로막혀

복음전파 나섰던 예수회원들 서학서 번역해 과학기술 소개
서양천문학과 지리학 비롯해 근대과학 폭넓게 다뤘음에도 뿌리 깊은 현지 이념 극복 못해

 

마테오 리치의 스승이자 과학기술 서학서의 초기 원저자인 클라비우스.이진현 신부 제공

 

“선이란 길이만 있고 폭이 없는 것으로 평면 하나에 빛이 비침과 안 비침 사이 틈과 같다.”

이것은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가 공동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 1607)에서 선을 정의하는 구절이다. 원래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은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 선은 폭이 없는 길이다”로 시작한다. 사전 설명도 주해도 없이 최소한의 간결한 정의로 추상적 공리체계를 전개한다. “A는 B다”로 정의 내리는 순간 한정되고 특정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논리에 오류가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A는 C가 아니다” 식으로 논리의 모순을 피하면서 자명한 명제를 내세우고 공리를 확장시켜 나간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의하고 증명하고 반증하는 논리 전개다. 명말 중국 지식인들은 리치가 소개한 이런 방식이 낯설었다. 그래서 굳이 ‘빛이 비침과 안 비침 사이’라는 설명을 추가했다. 이런 동양식 비유는 연역법 논리체계에서는 허용될 수 없고 허용돼서도 안 된다. ‘빛’과 ‘사이’ 등의 단어들을 사용한 것은 서광계를 이해시키기 위한 리치의 방편일 수도 있고, 리치의 설명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서광계의 해설일 수도 있다.

■ 한문서학서는 서양 선교사들과 동양 유학자들의 지적 협력의 열매

누가 이런 문장을 썼건 서로가 전혀 다른 언어와 논리체계 ‘사이’에서 창의적 사유를 펼치며 서로의 이해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구역-인역’(口譯–寅驛)이라고도 불리는 이런 공역(共譯) 방식은 선교사가 구술(口述) 중국어로 설명하고 유학자가 한문으로 필술(筆述)한다. 수동적 받아쓰기 직역이 아니라 현지 지식인 고유의 사유와 언어로 새로 쓴 창의적 재해석이다. 따라서 한문서학서 간행은 예수회 선교사들만의 천재적·헌신적 업적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 유학자들의 창의적 재해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동서양 지식인의 협력은 리치와 이지조(李之藻) 사이에서 더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이들은 나중에 「기편」(器編)으로 알려진 과학기술 분야 서학서들을 번역 저술했다. 「기하원본」, 「건곤체의」, 「동문산지」, 「혼개통헌도설」 등 대부분의 「기편」 서학서들은 유럽의 저명한 수학과 천문학 교수이자 리치의 스승이었던 로마대학 예수회원 클라비우스의 저서들을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서학서의 결정적 한계는 부분 발췌 번역이 많고, 중국인이 직접 유럽어를 익혀 원서를 번역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현지인의 중화주의적 태도가 서양지식의 직접 탐구를 가로막았다.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이 활동했던 17세기와 18세기는 코페르니쿠스–티코브라헤–케플러–갈릴레오–뉴턴으로 이어지는 과학혁명의 시기였다. 같은 기간 예수회원들은 서신교환을 통해 유럽의 최신 지식을 선교지에 전파하고 역으로 선교지의 지식을 유럽으로 전해줌으로써 그 이전의 간헐적이고 간접적인 교류를 넘어서 사실상 단일 조직으로는 최초로 장기지속적인 전지구적 지식유통망을 구축했다. 특히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일방적 전달자가 아닌 양 문명 사이 지식 중개자 역할을 했다.

예수회의 서양과학 전래는 강희제 시기 절정을 이뤘는데, 그는 프랑스 예수회원들로부터 수학을 직접 배워 그들을 당황케 할 정도의 탁월한 지적 성취를 이뤘다. 강희제는 황자들에게도 서양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만주어 서학서까지 간행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강희제가 선교사들로 하여금 중국 전역을 답사하여 제작하도록 한 ‘황여전람도’는 당시 세계 최고로 정밀한 지도로서 서양천문학과 지리학을 현지에 적용한 모범사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성도 어디까지나 황제 통치 강화를 위한 외래지식 독점이 목적이어서 교육과 경쟁을 통한 지식의 확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천문역법과 지도제작술은 황제의 지식으로 간주되어 황궁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명청 흠천감은 예수회가 전한 최신의 천문지식으로 「숭정역서」–「서양신법역서」–「역상고성」–「역상고성후편」으로 이어지는 시헌역법을 개선했다. 그때마다 개정역법은 더 정확한 천문값을 달력에 반영했지만, 정치·사회 전반에 길흉택일 관습이 스며든 전통 태음–태양력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중국의 서양천문학 수용이라기보다 서양천문학의 중국화였다.

 

휴대용 천문관측기 해설서 「Astro-labium」 (1593). 클라비우스가 리치에게 보냈다.

 

리치와 이지조의 공역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 1607). 리치가 클라비우스에게 보냈다.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1711~1721). 중국 전역을 정밀하게 측량한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적 지도였다. 한반도 지도는 따로 붙인 것이다. 조선 조정은 안보 문제 때문에 청 당국의 측량대 진입을 막고 일부러 엉성한 지도를 청에 제공했다.

 

17세기 북경 북당 서재에 소장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은 초창기부터 태양중심설을 가설로 가끔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실제 역법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 예수회원들의 서양 과학기술 중국 전래의 오해와 실상

몇 가지 고정관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우선 예수회 선교사들은 과학기술 전래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예수회원들의 한문서학서 간행본이 총 450편인데 이 중에서 종교와 윤리 분야가 330편으로 73.3%, 과학과 기술 분야는 120편으로 26.7%를 차지한다. 수치가 보여주듯이 예수회원들은 과학기술서보다 신학교리서를 3배가량 더 많이 집필했다.

그럼에도 과학기술 서학서가 부각됐던 이유는 우선 그 지식이 중국 지배층에 가한 신선한 충격 혹은 호기심 유발 때문이었고, 다음으로 중국 황실의 필요에 따라 선별한 실용적 지식만이 「사고전서」(四庫全書) 같은 공식문헌에 실려 현지 학인들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학서 구성의 차이는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과학기술 전문가였지만 복음전파라는 본연의 사명을 위해 꾸준히 신앙 관련 저술에 충실했음을 보여 준다.

다음으로 선교사들은 유럽의 근대과학을 외면하고 중세 자연철학이나 신학적 우주론만 고집하지 않았다. 선교사 공동체와 성당 서재에는 코페르니쿠스 책을 비롯한 당대 최신의 천문학서들이 가득했다. 중국 선교사들도 태양중심설을 접하는 데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가설로 소개한 정도였고 중국 측도 역법개정에 필요한 만큼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교회에서 태양중심설이 법칙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유는 성경적·신학적 이유도 있었지만 관측 증거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수회원들은 대신 티코브라헤 절충모델을 실측에 가까운 것으로 선호했고, 케플러 타원궤도를 비롯한 카시니의 대기굴절까지 최신 천문학을 중국역법에 반영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중국 황실에서도 정확한 달력을 위해 눈에 보이는 대로 천체운동을 기술하는 지구중심설의 실용성이 중요했지, 태양중심설을 오히려 번거롭게 여겼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 전통 우주관에 익숙했던 중국인들은 태양중심설 이전에 지구구형설 수용을 오랫동안 주저했다. 이들은 리치의 ‘곤여만국지도’와 「건곤체의」(乾坤體儀) 등을 통해 구형의 땅 위에서 중국이 더 이상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 아님을 인식했지만 천구의 평면투영 원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고대 개천설(蓋天說)이 비로소 혼천설(渾天說)과 통합됐다는 식의 억지 해석으로 이념적인 중화주의에 기울어졌다. 심지어 강희제 시기에는 “서양과학의 원천이 고대 중국에 있었는데 서양인이 그 지식을 훔쳤고 중국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서학중원설까지 등장한다.

요컨대 예수회 선교사들의 과학기술을 통한 중국의 복음화는 성과가 미미했고 뿌리 깊은 중화의식과 황제 중심의 선택적 실용주의 때문에 문명사적 대전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18세기까지 유럽은 중국을 과대평가했고 중국은 유럽을 과소평가했다. 오히려 서학서를 통한 복음화의 결실은 유럽도 중국도 예수회도 예상하지 못한 극동의 한 나라에서 맺어진다.

이진현 신부(예수회,서강대 신학대학원 조교수)
1998년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예수회에 입회해 2010년 사제품을 받았다. 2011년 호주 멜버른 신학대에서 신학 석사, 2018년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 신학대학원 조교수,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