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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2) 중국교회와 조선교회

dariaofs 2021. 9. 22. 00:29

천주교 탄압 극복하고 선교사제 조선 입국 전진기지 역할

조선교회 관할 맡은 북경교구 주문모 신부 조선으로 파견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후 전교 나선 파리 외방 전교회
만주·상해 등지에 거점 두고 조선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파견해 조선에서 사목한 최초의 신부로 1795~1801년까지 사목활동을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와 친척과 지인에게 전교하고 세례를 줌으로써 조선 천주교회가 성립됐다. 이후 1789년과 1790년 2차에 걸쳐 조선 신자들이 윤유일(尹有一)을 북경에 파견함으로써 조선교회가 자생적으로 생겨난 사실이 중국교회는 물론 로마 교황청에도 알려지게 됐다. 사제의 전교 없이 자생적으로 조선교회가 성립한 것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 조선 천주교회의 성립과 북경교구의 관할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의 보고를 받은 교황청은 1792년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교회의 관할권을 위임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교회는 북경교구 관할에 속하게 됐고, 북경교구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1795년 1월 조선에 밀입국시켰다.

조선교회는 성립과 동시에 전통 질서에서 벗어난 서양 종교이자 외세를 끌어들이는 집단으로 낙인찍혀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됐다. 1801(신유)년에 일어난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 신자들이 처형됐다.

박해 이후 10년 만인 1811(신미)년 조선 신자 대표가 북경에 나타나 북경교구장과 교황에게 조선교회의 재건을 알리고 선교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청국 정부의 탄압을 받던 북경교구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1817년 남경에서 두 명의 중국인 신부를 파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부들이 국경에서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입국에 실패했다. 1824년 말 조선 신자 대표인 정하상(丁夏祥)과 유진길(劉進吉)은 북경에 도착했고, 직접 교황에게 선교사제 파견을 청원하는 서한을 작성해 북경교구에 제출했다. 이 서한에서 조선 신자들은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선교사제 파견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주국의 연호인 강덕 5년(1938년) 당시 차쿠성당 모습. 1869년부터 1881년까지 조선대목구의 ‘대표부’가 있었다.이석원 연구실장 제공

 

■ 조선대목구 설정과 파리 외방 전교회 관할–중국 내 대목구 증설과 전교회의 진출

1831년 9월 9일 교황청은 조선 선교지를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대목구(代牧區)로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조선 전교를 자원했던 브뤼기에르(Bruguière) 주교를 임명했다.

조선대목구 설정은 줄기차게 선교사제 파견을 요청하는 조선 신자들에 의해 촉발된 것이지만, 동시에 포르투갈의 ‘선교독점권’(Padroado)을 축소하려는 교황청의 전교정책과 맞물려 있다.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을 계기로 중국 내에 대목구가 증설됐고 서양 전교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됐다. 1857년에는 교황청과 포르투갈이 조약을 맺어 사실상 포르투갈의 중국 선교독점권이 해체됐다.

조선대목구 설정은 이전까지 전교가 부진했던 만주, 요동 지역은 물론 일본까지 천주교를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따라서 포교성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 조선대목구를 맡기면서 일본에 대한 전교 권리를 함께 부여했다. 1836년에는 조선대목구장에게 유구열도(流球列島, 현 일본 오키나와)의 관할권을 부여했고, 대만 지역의 전교도 논의됐다.

포교성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1838년 요동대목구를 북경교구에서 분리 설정했다. 요동대목구는 1840년 다시 몽골대목구와 만주대목구로 분리됐다. 이후 만주대목구는 조선 전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됐다.

조선대목구는 설정 당시 동아시아(일본, 유구, 대만) 전교의 교두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1839(기해)년 천주교 박해로 대목구 자체의 존속이 위태롭게 됐다. 따라서 1845년 재입국한 선교사제들은 주변 국가의 선교보다는 조선교회의 재건에 주력하게 됐다.


중국의 조선 전교 주요 거점

 

■ 조선 전교의 전진기지–마카오(홍콩) 대표부, 상해와 지부 항구 등

파리 외방 전교회 마카오 대표부(1847년에 홍콩으로 이전)는 조선대목구와 프랑스 본부의 연락을 중계하면서 조선대목구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는데,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운영해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천주교가 탄압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선교사제들이 조선 입국을 준비하는 전진기지가 필요했다. 육로와 해로로 연결된 중국 지역에 그 거점이 마련될 수밖에 없었다.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Maubant) 신부는 당시 프랑스 라자로회의 전교 거점이었던 서만자(西灣子, 현 하북성 장가구시 숭례현)를 조선 입국의 출발지로 삼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도중에 병사했지만, 모방 신부는 변문(邊門, 현 요녕성 단동시 변문진)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1840년 말 페레올(Ferréol) 신부는 만주 소팔가자(小八家子, 현 길림성 장춘시 녹원구)에 거처를 잡았다. 1843년 페레올 주교가 제3대 대목구장이 되자 소팔가자는 조선 파견 선교사제들의 거점이 됐다. 여기서 김대건과 최양업이 부제품을 받았고, 메스트르(Maistre) 신부가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해로를 이용해 상해(上海)에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데리고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선교사제들은 해로를 통해서만 조선에 들어오게 됐는데, 배가 출발하는 주요 항구가 1842년 남경조약 이후 개항한 상해였다.

당시 상해에는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제들이 전교활동을 했는데 조선 선교사제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최양업은 상해의 예수회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칠 수 있었고, 1849년 강남대목구장인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1852년 메스트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할 때에는 예수회 엘로(Helot) 신부가 직접 중국 배를 구해 고군산도까지 왕복하기도 했다.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1860년 이후 산동과 요동의 항구가 개방되자 지부(之罘, 현 산동성 연태시 지부구)는 조선과 중국을 잇는 항로 중 가장 짧은 경로의 출발점이 됐다. 지부는 조선 입국 전 샤스탕(Chastan) 신부가 사목하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과 가까운 해안가에 위치한 차쿠(岔溝, 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는 최양업 신부가 입국하기 전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66(병인)년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중국으로 피신했던 선교사제와 새로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제들이 차쿠에 모여들었다.

제6대 대목구장 리델(Ridel) 주교는 1869년 초 만주대목구장 베롤(Verolls) 주교와 협의해 차쿠 지역의 사목관할권을 부여받았다. 차쿠에 조선대목구 대표부가 설치됐고,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으로 불리는 차쿠성당은 조선 입국의 거점이 됐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선교사제들은 1876년 차쿠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리델 주교는 강화도조약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일본을 통해 선교사제를 입국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결국 1881년 대표부는 일본 나가사키로 이전됐고, 남아 있던 선교사제들이 차쿠를 떠나면서 조선대목구의 사목관할권은 자연 소멸됐다. 1885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Blanc) 주교는 더 이상 해외 거점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나가사키의 조선대목구 대표부를 폐쇄했다. 1886년 조불조약이 체결되면서 기나긴 ‘박해의 시기’는 끝났고, 중국교회의 지원 없이 조선대목구는 전교와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면서 발전하게 됐다.

양관성당(현 요녕성 개주시 나가점)은 만주대목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제3대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주교품을 받았던 곳이다.

 

1874년 북경교구의 주교좌성당인 선무문천주당의 모습.

 

 

이석원(프란치스코)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조선후기 정치사상사·천주교회사를 전공하고 있다. 현재 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