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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4) 혼돈과 얼룩의 시간 - 의화단 사건

dariaofs 2021. 10. 26. 00:11

유럽 열강·교회에 대한 반발… 끝내 비극 부른 증오와 폭력

비밀종교의식 공유하던 의화단
민생파탄으로 조직 급속 확대
청일전쟁 후 위기 몰린 서태후
서양과의 투쟁에 의화단 이용
사제·신자 살해 등 참극 불러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 1900년 8월 5일자에 실린 삽화 ‘만주 봉천의 성당에서 벌어진 학살’. 의화단이 주교 1명, 신부 2명, 200명이 넘는 중국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시신을 절단했다는 기사와 함께 실려 있다.김윤선 교수 제공

 

 

“1900년 중국 북경. 이전부터 이어진 가뭄 피해로 인한 흉작으로 1억의 민중이 굶주렸으며, 민심은 흉흉하고 불안했다. 먼 12개국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외국인 거류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의화단(義和團)을 소재로 한 영화 ‘북경의 55일’ 첫 장면에 나오는 내레이션이다. 영화는 주인공인 미국 해병대 루이스 소령이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령은 선교사를 구하고자 했지만 선교사는 이미 의화단원들에 의해 살해된 후였다.

■ 의화단의 기원 및 성장

의화단은 의화권(義和拳)에서 유래했다. 의화권은 팔괘교, 천리교, 매화권, 금종조(金鐘罩), 신권(神拳) 등 비밀종교의 성격을 띠었으며, 권법을 훈련해 신통한 무술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려는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제단을 설치하고 특정 신상을 숭배하면서 신내림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을 공유했다. 백련교를 비롯해 옥황상제, 관우, 항우 등을 숭상하는 민간신앙인 신명(神命)이 여기에 섞였다.

무술능력이 있는 ‘대사형’(大師兄), ‘이사형’(二師兄) 등의 권사들이 조직을 이끌었고, 단(壇) 혹은 창(廠)을 설치해 무술을 익혔다. 1897년 초에 장여매(張汝梅)가 산동성 순무(巡撫)로 부임했다. 그는 1898년 6월에 의화권을 단련시켜 각 지역(鄕)의 자위대(自衛隊)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그가 청나라 조정에 올린 상주문에서 처음으로 산동성 동명(東明), 관현(冠顯) 등지의 의화권을 가리켜 ‘의화단’이라는 호칭을 썼다. 이후 의화권은 공식적으로 의화단으로 불렸다.

1898년 4월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이들의 가담으로 의화단 조직이 확대됐다. 민생파탄과 교회에 대한 분노와 반감, 그리고 정치권력의 개입이 이들의 결집과 성장을 추동했다.

■ 교회에 대한 반감과 부청멸양(扶淸滅洋)

교회는 1860년 체결된 북경조약의 특약을 이용해 토지를 매입하고 교세를 키웠다. 또한 1896년 총리각국사무아문에서는 ‘지방관의 주교와 사제 접대 사무’를 발표했으며, 1899년 청나라 조정이 ‘전교장정’ 규정을 반포했다. 이를 통해 선교사의 위상과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대주교와 주교는 독무와 동급이었다. 독무는 총독과 순무로 지방에서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몬시뇰과 사제도 그 이하의 지방관과 동급이었다.

게다가 교회는 교인들의 소송사건에 개입해 교인이 아닌 이들과 갈등이 일어났다. 산동성에서는 마을 수호신 사당인 옥황묘와 그 주변 땅은 마을 공동재산이므로 분할하자는 교인들의 건의로, 선교사와 교인이 매화권민들과 다퉜다. 1898년 1월 산동성 순무 장여매가 명령을 내려 옥황묘를 철거시키자, 같은 해 10월 24일 매화권민 3000여 명이 교난(敎難)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이들은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돕고 양인을 몰아낸다)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산동성에서 의화단 세력이 확대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열강의 요청으로 1899년 12월 산동성 순무로 부임한 원세개(袁世凱)는 의화권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이것은 의화권 세력이 하북성으로 번지는 계기가 됐다. 의화권은 철도, 교회, 전선 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고, 그리스도교인의 학살을 자행했다.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 1900년 7월 8일자에 실린 서태후. 유럽을 적대시하는 의화단 운동도 그녀의 작품이라는 내용이 함께 실려 있다.

 

                                                            의화단 단원들의 모습.

 

■ 서태후의 개입과 의화단사건

특히 의화단사건을 초래한 원인은 이를 이용하고자 한 권력투쟁 때문이었다. 의화단은 서태후의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청일전쟁에서 패함으로 국가 위기가 고조되자 서태후(西太后)는 광서제 중심의 변법파를 숙청하고 재집권을 노렸다. 1900년 1월 서태후는 광서제의 폐위를 시도했으나 열강의 간섭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의화단 세력으로 열강을 중국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1900년 6월 11일 의화단이 북경을 공격하자, 6월 21일 서태후는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화단과 관군의 연합세력이 각국 공사관을 공격했다. 북경의 천주당도 공격 대상이었다. 프랑스 병사가 지키고 있던 북당을 제외하고, 동·서·남당이 모두 훼손됐다. 연합군은 폭도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의화단을 제압했고, 북경의 동교민항(東交民巷, 외국 공사관이 있었던 지역)은 55일 만에 의화단의 포위에서 풀렸다.

청조는 1901년 9월 7일에 열강과 신축조약(베이징의정서) 12개조를 체결했다. “중국은 각국에 배상금 백은 4억5000만 량을 1940년까지 39년간 연이율 4리로 원리금 합계 9억8000만 량을 배상한다. 북경의 동교민항의 민간거주지를 사관구(使馆區, 대사관 지역)로 설정하고, 각국 군대가 주둔해 보호하며, 중국인의 경계 내 거주를 불허한다” 등의 내용이 신축조약에 포함됐다. 이 조약으로 열강에 대한 중국의 종속과 굴욕감, 반그리스도교 정서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 반그리스도교를 넘어 사랑과 평화의 길로

의화단사건으로 중국교회 주교 4명, 신부 31명, 3만여 명의 신자들이 희생됐다. 희생된 천주교인들은 비오 12세 교황 때부터 복자 반열에 올랐다. 2000년에는 소화 데레사 축일인 10월 1일에 로마에서 중국천주교회 120위 시성식이 있었다. 이 중 86위가 의화단사건으로 순교한 성인이었다. 이에 대한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의 반발 역시 거셌다. 8개국 연합군 침략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에게 적국 열강의 종교로 인식됐다.

중국천주교회의 아픈 역사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의화단사건은 우리에게 더 낮은 곳으로 임하는 교회, 어떠한 기득권도 먼저 포기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선교와 복음화가 그리스도교의 세력화가 아니라 종족을 넘어 인류가 사랑과 평화의 길로 나가는 과정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중국교회에서도 이 길을 찾아간 이들이 이어졌다.

중국 선교의 길을 개척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소화 데레사는 전교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역시 중국 선교를 열망했다.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방법으로 반그리스도교를 넘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길을 두 성인이 이미 우리에게 알려줬다. 전교의 달 10월을 지내며, 중국교회를 위해, 각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이들과도 평화의 길을 이어가고자 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특히 의화단사건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두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가 먼저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다. 민심을 잃은 종교,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이 오지 않고 그들이 외면한 그리스도교, 그들을 품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김윤선(소화 데레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천주교회사 연구자들과 함께 공부하며, 천주교회사 전개과정에서 형성된 천주교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