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죄로 인한 벌이 아니라 사랑의 귀결”
▲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께서 고통을 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 하시면서 치유와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사진은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만나 위로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이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고통을 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하시면서 치유와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아마도 프란치스코에게 나환우의 모습으로 나타나 프란치스코를 회개의 삶으로 이끄신 주님의 계획도 바로 이런 동정의 자비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왜 하느님은 그 순수한 사람들을 살려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참이나 했었다. 아마도 참사 이후 사람들이 겪었던 트라우마 안에는 이런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필자는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힘들었을 때 문득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삶을 살았던 엘리 위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장본인이 엘리 위젤인지, 다른 어떤 사람의 이야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가 노역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다섯 명의 동료가 교수형을 당하고 있었다.
그중 네 명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는데, 한 사람은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너무도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몸이 가벼운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공개 처형 상황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런데 그때 엘리 위젤 옆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괴로움 속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저 아이가 저렇게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데 당신의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그때 엘리 위젤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 하느님도 저 아이와 함께 저렇게 고통스럽게 목매달려 죽어가고 있소!”
세월호 참사 때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셨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도 먹먹해졌다.
그러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그렇게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방식으로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셔야 하는가 하는 답답한 의문도 들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분의 수난이 다가오자…’ 그분의 수난은 인간 조건을 가진 모든 사람은 겪어내야 할 수난이었기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든 저렇게든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분은 제자들과 파스카를 기념하시면서 빵(그것은 당신처럼 작은 것이다)을 들고 축복하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계약을 위한 나의 피이다. 죄를 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다.’” 이 쪼개어진 그리스도, 즉 성자 하느님의 몸이 여러분에게 주어진다!”
프란치스코는 카타리파의 잘못된 생각에 대응하여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여러분의 고통은 죄로 인해 받는 벌이나 그 결과가 아니라, 여러분이 진정한 사랑을 살아갈 때 수반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동정녀의 태중으로부터 태어나시는 연약함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탄생은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하느님이 사랑으로 인해 연약한 인간 조건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리고 성모님 역시도 사랑으로 인해 세상의 구세주, 즉 사랑과 연약한 하느님, 한 아기를 받아들이신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고통이 벌이 아니라 사랑의 귀결이다. 한 어머니가 생명을 낳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것처럼, 사랑으로 취해야 할 하나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죄 많고 연약한 교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벌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 형제자매들은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라고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주셨다. 즉 공동체를, 형제애를, 자매애를 창조해내라고 우리를 인도해주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써 함께 삼위일체적 모델을 창출해 내라고 초대하시기 위해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다.
②온몸으로 아는 앎- 존재적 앎(kinesthetic knowing)과 참여적 앎
앞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언급했듯이, 하느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이 물질 세계에서 어떤 대상을 알아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참여적 앎이다.
리처드 로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그리고 고유하게는 삼위일체)은 우리가 다른 대상 ─예를 들어 기계나 객관적 개념, 혹은 나무들─ 을 아는 것처럼 알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객관화’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대상들을 보고 우리의 정상적 지성을 통해 그 대상의 여러 부분을 분석하고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여 멀리서도 그것들이 무언지를 판단한다.
이때 우리는 부분들을 이해하는 것이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관련된 대상들은 절대 이런 식으로 객관화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오직 그것들과 하나 됨으로써만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주관화’이다!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이들이 그저 단순한 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양쪽이 다 상호 존중의 ‘나-당신’의 관계에 편안히 있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앎에 이르는 것이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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