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같은 마음 갖는 동정심이 성령의 마음
▲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웃과 같은 마음이 되어주는 ‘동정심’은 어떤 것도 허투루 보지 않고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게 해주는 성령의 마음이라고 설교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다. |
하느님의 본질이 관계성이기에 우리 역시 이 관계성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된다. 관계성이신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당신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당신의 모상을 심어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 중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웃과 같은 마음이 되어 주는 ‘측은지심’ 혹은 ‘동정’(同情)이다. 이 마음은 어떤 것도 허투루 보지 않고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게 해주는 성령의 마음이다.
결국, 수양 혹은 자신을 갈고닦아 나가는 것은 우리 존재에게서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선물을 존중의 마음으로 깨어 바라보며 은총에 힘입어 반복적으로 이를 키우고 촉진해가는 일이다. 이것 외에 하느님을 아는 방식은 없다. 이렇게 온 존재로 참여함으로써 알게 된 지식은 다른 말로 ‘존재적 앎’ 혹은 ‘운동감각적 앎(kinesthetic knowledge)’이라고 한다.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존재로 아는 것이다.
이 운동 감각적 앎에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아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두 바퀴로 가는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론으로 배우게 된다. 즉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원심력을 사용해야 하기에 넘어지는 쪽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리라는 이론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알게 되면 그 원리를 머리로 알아서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몸이 그것을 기억해서 자전거를 탈 수 있고, 또 한 번 몸으로 알게 된 이 앎은 우리 몸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잊히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덕에 참여하여 그 덕을 수양의 마음으로 꾸준히 실행해 가면서 그 덕으로 인해 갖게 되는 복됨의 의미를 몸에 익혀 살아갈 때 비로소 그 덕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온갖 덕이 다 하느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달리 말해 덕을 몸에 익히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은 다 같은 이치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덕들에 바치는 인사」 6-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덕 목록에 ‘존중’ 혹은 ‘존경심’의 덕을 넣고 있지 않지만, ‘순종’의 덕에 사랑을 자매 덕으로 놓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육신의 억제로 영에 순종하고 자신의 형제에게 순종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이에게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으며, 또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들에게까지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 모두에 대한 존중심을 갖고 사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다른 존재에 대해 존경심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모든 덕도 부여해주실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저서 「Living Buddha, Living Christ(살아있는 부처, 살아있는 그리스도)」에서 성령의 본질을 ‘한 대상에 온 마음을 기울여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혹은 대하는 것(mindefulness)’이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바라봄’에 강조점이 놓인다.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우리가 반복하여 실천하는 것이 바로 수양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는 말이다. 틱낫한 스님의 말대로 우리가 모든 존재를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고 대할 때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이렇게 바라보는 ‘나’를 의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존중심과 존경심을 지니고 바라보는 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긍정이든 부정이든)과는 아무 상관 없이 존중심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처럼 자비로운 자 되라고 초대하시면서 여기에 참 행복이 있다고 가르치시기 때문이다.(마태 5,44-45; 루카 6,35-36 참조)
리처드 로어는 이것을 ‘관상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관상의 차원에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앎은 대상들을 참으로 온전하고 전체적으로 관계와 의미의 모든 차원에서 직관하게 해준다. 아마도 이 앎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체적 구도에서 그 대상들을 보게 해주는 앎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삶의 순간들에 대해 관상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늘 그 순간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우리 내면의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것(re-spect: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대상 대부분을 우리가 언뜻 부분적으로 관찰할 때 우리에게는 이런 존중심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직도 관상적 앎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다. 솔직히 여러분이 대상들을 관상적으로 볼 때 우주 안의 모든 것은 하나의 거울이 된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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