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체험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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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칸들은 프란치스칸 삶의 형태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그 만남의 내면적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적 삶’이라고 말한다. |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
① 삶의 전적인 기준이자 삶 전체가 된 복음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지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 것을 요청했던 것은 우리 교회의 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듯한 인상을 주는 편협한 의미의 선교와는 전적으로 달리 사람들에게 참다운 행복의 현실을 알려주고 이를 살아가게끔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름대로 하느님의 말씀, 특히 복음의 말씀이 분명히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야말로 복음(福音), 즉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복음을 삶으로 살아가기가 그렇게도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특별한 해설이 없어도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를 해설해주시는 분이 영으로 바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복음에 대한 강론을 듣거나 강론을 할 때는 이를 감동적으로 설명하고, 참으로 감동적으로 이해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하고 생각하고 말한 바를 삶으로 젖어들게 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설명한다면 좀 무리일까? 복음 말씀은 모두가 사실 어떤 한 가지 상황 혹은 몇 가지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데도 그 한 가지에만 적용하거나 아예 그것이 적용되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폭을 좁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은 사람들의 가진 바를 나누는 힘이 그러한 하느님의 표징을 드러나게 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가슴 깊이 공감하면서도 그러한 나눔에 자기식의 한계나 제한을 둔다. 즉 ‘이런 사람들에게까지만’, 혹은 ‘이 정도까지만’ 등등의 제한을 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참된 나눔이 불가능해지거나 아예 나눔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한 가지 상황에 완전하게는 적합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한계성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한 가지를 알아들으면 그것이 모든 삶에 적용되는 지침이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복음의 말씀 하나가 모두가 되었고 그 모두가 그 하나로 집약될 수 있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선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해석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해 스스로가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던 삶을 용서해주고 치유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느님이 우리의 죄와 어둠마저도 우리 구원을 위해 활용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그에게는 어떤 것도 복음을 살아가는 데 제약이 되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복음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 자기 삶에 깊이 들어설 수 있었다. 자기 삶에 깊숙이 들어선 그 복음의 인격에 힘입어 또 다른 그리스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복음 전체를 받아들여 삶 속에 젖어들게 하였던 사람이다. 이를 통해 그는 하느님 나라의 체험, 즉 참 기쁨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Vita Evangelica)’이 지닌 핵심은 어떤 특수한 사도직이나 물리적 공동 현존(기도와 일 모두)을 첫 자리에 두는 삶이 아닌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교회의 수도생활과 관련한 문헌들을 보면 수도생활의 형태를 크게 두 가지, 즉 ‘수도승적 삶(Vita Monastica)’과 ‘활동 사도직 삶(Vita Apostolica)’으로 분류하는데, 엄격하게 말한다면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시를 받아 시작한 삶은 이 두 가지 수도생활의 형태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교회가 수도생활의 형태로 명시하지 않는 삶이긴 하지만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프란치스칸 삶의 형태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그 만남의 내면적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적 삶’이라고 말한다.
이 ‘복음적 삶’의 토대에는 본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또 다른 그리스도로의 인격으로 창조되었지만, 우리의 연약함과 죄로 기울어지려는 경향과 그 죄 때문에 지금은 왜곡된 우리의 인격을 또 다른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되돌려야 할 과제가 들어있다.
이 왜곡은 어떤 물리적인 왜곡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바라봄’의 왜곡이므로 이를 회복하려면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눈으로 하느님의 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과 다른 인격체들을 바라보려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수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인격의 원형인 그리스도께 은총을 청하며 수양을 해가면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이들과 다른 존재들이 결국은 하나로 연결된 존재의 위대한 사슬의 부분들이요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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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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