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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2.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dariaofs 2021. 11. 5. 00:45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 바라봄이 곧 복음적 삶

 

                             


▲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상은 우리 마음 안에 동정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그림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나환우를 돌보고 있는 ‘franciscan friars’ 삽화.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

① 삶의 전적인 기준이자 삶 전체가 된 복음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봄, 즉 관상은 우리 마음 안에 ‘동정(同情, compassion)’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결국, 하느님을 참으로 관상하고 세상을 참으로 관상하는 일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이 관상을 통해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천부적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 존재들과 떼어낼 수 없는 사랑의 연결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해 드린 ‘interface’, 곧 ‘얼굴을 서로 교환하는 것’, 혹은 ‘두 개체나 두 사람이 공통의 얼굴을 지니는 곳(혹은 지니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우리를 하늘나라의 현실에서 살아가게끔 해주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서로 간의 단절과 생태계와 지구 전체의 위기를 극복해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각이고 의식이다.

그리고 복음적 삶이 우리의 대안적 삶이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 투쟁 아니면 도망, 옳음과 그름 등과 같은 이원적 논리가 첫째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자기 비움과 이 비움을 통한 서로 간의 연결이 그 중심에 있게 된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곳이다. 이 관상과 서로 간 사랑의 바라봄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선제권을 갖고 계신 우리에 대한 사랑의 응시를 알아차려야 하고, 이 응시의 흐름이 우리 존재를 통해 하느님과 다른 존재들에게 흘러나가도록 ‘나’라는 수로를 잘 비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우선하는 일은 하느님 사랑의 바라봄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를 우리는 잘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자모적이고 자부적인 하느님 이미지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매튜 폭스(Matthew Fox)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동정은 어디에나 있다. 동정은 세상의 가장 풍요로운 에너지의 원천이다. 세상이 지구촌이 된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동정이 더 필요하다. 이는 이타주의나 철학 혹은 신학의 구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의 인류 역사에서 제대로 탐구되지 않고 건드려지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이 바라지도 않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동정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요원하게 느껴진다. 그 옛날 동굴에 거주하던 인간들이 동정 대신 폭력의 경향이 그 무엇이건 간에 산업화 사회의 맹공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동정이 없어진 상황은 이제 세상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이런 동정의 부재 상황을 묵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인간이 이 우주의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동정심이 가득한 피조물이라는 창조된 세상과 인간 본성의 충만함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격체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라도 동정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동정의 부재로 인해 모두 희생자가 되었다. 몇몇 사람이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희생자이고 더러는 아닌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희생자가 되었고, 동정의 결핍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의 인간성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응시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부정적 에너지와 감정은 점차로 자리를 잃고 녹아내려 사라져버릴 것이다.

「나환우 프란치스코(Francis the Leper)」에서 저자들(Joanne Schatzlein, OSF, RN, MA와 Daniel P. Sulmasy, MD, Ph.D.)은 프란치스코가 나환우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심지어는 프란치스코의 몸에 생긴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이 나병의 상처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물론 이 저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교회의 신비 전통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또 그 주장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매우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머레이 보도 신부(Fr. Murray Bodo, OFM)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만일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던 나환우들에게서 병을 얻어 그들과 같은 나환우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와의 극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진 것이고, 그 자체로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한 것”이라는 역설한다.

그러면서 그는 “몰로카이 섬에서 자신이 사랑으로 보살피던 나환우들과 같이 나환우가 되어 삶을 마감한 다미안이 성인으로 추앙을 받는 이유도 바로 그의 자기 비움의 사랑이 하느님의 은총이요 신비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강력한 자기 비움의 역설적 메시지를 계속해서 선포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취하실 정도로 터무니없이 겸손하게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우리 구원과 완성의 시작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비천한 모습과 같아지시는 구세주보다는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쳐주시는 위대한 장군 메시아를 더 선호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