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함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모적 사랑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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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한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하였다. 피에트로 로렌제티, ‘성모자 사이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와 요한 사도’, 프레스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
②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감과 서로 간에 어머니가 되어 줌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에는 창조와 완성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결합, 혹은 일치가 들어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서지기 쉬움, 그리고 악으로 쉽게 기울어지는 경향은 인간을 스스로 불행으로 몰아가게 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본질 전체에 속하는 한 부분임을 온전히 인정한다면 그 시점부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힘의 작용을 체험하게 된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손길을 뻗쳐주시는 분이시긴 하다. 하지만 떠오르는 해나 비를 우리가 피할 수 있음도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예수님께서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은총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 현실의 약함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생명과 아름다움, 통합과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주님 영의 현실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따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이며 이것은 주님 삶과 말씀으로 이루어진 ‘복음’의 실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저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약함과 깨어지기 쉬움 등과 한계들을 모두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분은 모든 이가 당신께로 온전히 되돌아가 그분의 신성에 완전히 결합할 가능성을 열어주셨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셔서 이런 엄청난 은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셨다면 이 방식이야말로 인간 완성의 근본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인간의 연약한 현실이 본래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해 남용한 까닭에 빚어진 왜곡된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왜곡된 인간의 현실이 우리의 본질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제2차적 본질을 분명히 직시할 때 우리 인간을 이 제2차적 본성에서 벗어나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에 일치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와 사랑을 보게 된다.
‘suffering’은 본래 ‘받아들인다’ 혹은 ‘허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르코 복음(8,5)과 루카 복음(9,48)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어린이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자녀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을 내어주고 길러주는 사랑이 진정한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suffering’)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시며 당신을 내어주시는 자모적 사랑이고, 하느님의 이런 받아들이시는 사랑의 모상을 각인 받은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 중심에는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자기 삶을 마감하며 쓴 유언에서 고백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쓴맛’이 단맛으로 변하는 데 필요했던 덕이 바로 ‘자비(misericordia)’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자비를 말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를 “그분께서는 그들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내게 보여주셨습니다”로 바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 본다면 이렇게 바꾸는 것이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고 자신과 나환우들 역시 그분 자비의 매개체이자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통해 주님의 자비를 입어 회개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언젠가 이 유언의 어떤 영어 번역본에서 “그들에게서 떠나올 때”를 “그들을 온전히 알게 되었을 때”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우를 온전히 알게 되면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이고, 그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그는 역겨웠던 것을 단맛으로 느낄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나환우의 일그러진 외모를 통해 자신의 나환우성을 볼 수 있었던 것이고, 이를 치유해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깨달음이나 인식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금방 자신의 연약성을 철저히 인식하고서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시 또 왜곡된 자기 모습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 또한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게 “늘 깨어 있으시오”(마태 25,13)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연약성을 순간순간 직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깨어있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프란치스코는 죽기까지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자 하였고 여기서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였다. 이를 통해 결국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모되었고, 또 다른 이들도 이 변모에 참여하게끔 계속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말하고자 하는 어머니 성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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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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