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이라는 찬가 속에 감춰진 ‘잔혹한 평화’
▲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서바이벌 게임, 곧 적자생존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
지금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하신 세 가지 차원의 집(인간생태ㆍ사회생태ㆍ환경생태)의 위기 중 첫 번째인 ‘인간생태(하느님의 집)’의 위기와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통한 그것의 재건에 대해 살펴봤다.
이번 연재부터는 ‘사회생태’로서 인간 공동체의 위기와 그 원인,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재건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작년에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1위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드라마는 많은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서정적인 ‘골목길 놀이’를 떠올리게도 했지만,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엿보게 했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서바이벌 게임, 곧 적자생존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 주었다. 이 드라마에서 무작위로 모집된 456명의 사람이 게임에 참여하는데 그들은 각자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범죄자부터 평범한 사업 실패자, 부당 해고자, 투자 실패자, 탈북자, 가정폭력 피해자, 외국인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각기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음의 게임’에 내몰린 사람들이다.
또한, 이 드라마에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빈곤에 대한 서사, 군림하는 강자와 사회적 약자들 사이의 분열과 갈등,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힘없는 노인과 여성, 이주 노동자는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된다.
참으로 닮은 ‘오징어 게임’과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각자도생’,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이라는 오징어 게임 규칙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규칙과 참으로 닮아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반포한 「복음의 기쁨」에서 신자유주의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늘날 사회의 모든 분야는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릅니다.
이 법칙에 따라 생활하면, 힘 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희생시켜 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대다수의 사람이 배제되고 주변화되고 맙니다. 주변으로 밀려나 그곳에서 벗어날 기회도 얻지 못하고 벗어날 가능성도 없이, 또 벗어날 어떤 수단도 없이 말입니다.”(「복음의 기쁨」 53항)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에 따르면 더 많이 가진 사람들, 힘센 경제 주체들에게 무한한 경제 자유를 허용하여 경제발전을 이루면, 그것이 ‘낙수 효과’를 일으켜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황은 낙수효과에 대해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조악하고 순진한 신뢰를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복음의 기쁨」 54항)고 일침을 가하며 그 허울을 직시했다.
왜냐하면 실제 세계 속에서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으며, 궁핍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오징어 게임’에서도 보여주듯이 ‘자유로운 선택’과 ‘공정한 게임’이라는 허울 속에 자기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
따라서 사회는 점점 분열과 갈등, 차별과 불평등이 심해져 인간성 파괴는 물론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적인 번영과 발전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OECD 국가 중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으며, 출산율도 세계에서 가장 낮다.
노인 빈곤율 또한 OECD 국가 중 세계 1위에 올라있고, 산업재해 및 비정규직 규모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모습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잔인한 평화’를 떠올리게 한다. 성인은 「신국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화와 전쟁이 잔인함으로 서로 겨루었는데 평화가 전쟁을 능가했노라. 전쟁은 무장한 자들을 죽였건만, 평화는 비무장한 사람들마저도 죽였도다.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럴 수만 있다면 죽일 수 있기에 전쟁일 진대, 죽음을 면한 이들을 살려주기는커녕, 죽어가는 자들이 저항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했던 것이 평화였다.”(「신국론」 3권, 28)
경쟁과 적자생존의 문화가 지배하는 현실
로마 공화정 말기에 ‘술라’와 ‘마리우스’라는 두 적대 세력 간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진 이후 평화가 도래하지만, 이 이면에 ‘잔혹함’이 감춰져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결국, 이 시기에 로마에서 시민 대학살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두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전쟁의 ‘잔인함’보다 더한 평화 시대의 ‘잔혹함’이 벌어질 수 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 시대에 평화라는 미사여구 뒤에 잔혹한 상황이 펼쳐진 것처럼 오늘날에도 경제발전이라는 찬가 속에서 ‘잔혹한 평화’가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미만이던 1960 ~1970년대보다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적인 번영과 발전을 누리고 있는 오늘날 이 시대가 어찌하여 자살률이 더 높고, 사회 전반에 걸쳐 우울함이 더 감돌고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상생과 협력을 등한시하고 경쟁과 적자생존의 문화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도록,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사명을 부여받았다.
또한,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몫을 서로에게 되찾아주고,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존엄성(모상)을 서로 지켜주는 관계 회복이 필요하다.
어떻게 사람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 나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상생협력의 집(공동체)을 재건할 것인가? 우선 ‘상생의 집’(공동체)이 무너지게 된 근원적인 원인을 찾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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