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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13)I.N.R.I

dariaofs 2022. 8. 20. 00:33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

 

▲ 주님의 십자가 죄명패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들어 올려진 왕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며, 주님의 죽음으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가져다준 거룩한 표징이다. 요한 복음서 말씀처럼 주님의 죄명패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글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새겨져 있는 스페인 엘에스쿠리알 수도원 십자가.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교리 내용을 오류 없이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초기부터 성화상(聖畵像)을 이용했다.

 

신앙 지킴이와 교리교사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는 성화상은 문자와 기호, 색과 형상 등 다양한 시각 코드를 통해 그리스도교에 관한 풍성한 정보와 영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번 호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성화상의 숨은 코드를 소개하려 한다. 그 첫걸음으로 ‘I.N.R.I’에 관해 알아보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중세 이전 성화상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아니었다. 특히 ‘십자고상’(十字苦像)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기 십자가 성화는 주님의 수난을 드러내기보다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영광의 상징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했다. 그래서 이 시기 십자가 성화는 예수님께서 눈을 부릅뜬 채 고통 없이 당당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모습을 주로 그렸다.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내 성화상 곧 십자가에서 눈을 감은 채 돌아가신 모습으로 표현한 십자고상은 10세기에 제작한 ‘게로 십자가’(Gero Kreuz, 970~976년)이다.

 

독일 쾰른대성당에 설치돼 있는 이 십자가는 게로 대주교가 신성로마제국 오토 대제의 명을 받고 황태자인 오토 2세와 비잔틴 황녀 테오파노를 정략 결혼시키기 위해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그곳에서 평소 묵상해왔던 인간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표현한 십자고상을 조각해 왔다. 이 십자고상에 주님의 죄명패인 ‘I.N.R.I’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I.N.R.I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IESVS NAZARENVS REX IVDAEORVM)라는 라틴말 첫 글자들의 약자이다.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는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십자가형 선고를 내려며 붙인 죄명패이다.

 

고대 로마 제국의 관례에 따르면 죄명패는 사형수의 목에 걸거나 몸에 붙여놓았다. 그런데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다.”(요한 19,19)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명을 당시 유다인들의 대중 언어인 히브리 말과, 로마 제국의 공무와 행정 언어인 라틴 말(IESVS NAZARENVS REX IVDAEORVM), 상거래 언어인 그리스 말(ιησου ο ναζωραιο ο βασιλευ των ιουδαιων)로 나란히 쓰게 하였다.(요한 19,20 참조)

이는 유다인뿐 아니라 예루살렘 도성에 있는 로마 시민과 많은 외국인에게 로마 제국의 통치에 맞서면 그가 임금이라 해도 단호하게 그를 처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빌라도의 명백한 경고였다.

 

하지만 빌라도의 의도와는 달리 이 세 언어로 쓰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명패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두루 선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곧 십자가 죄명패는 주님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었다는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해 주었다.

예수님께 관한 빌라도의 최고 관심사는 바로 ‘주님의 왕권’이었다. 빌라도는 ‘하느님의 나라’와 ‘주님의 왕권’에 대해 예수님께 집요하게 신문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유다인들의 임금’ 곧 ‘메시아’로 선포했다. 이 일로 빌라도는 주님의 왕권에 대한 증인이 되었고, 십자가 죄명패는 또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한 존칭이 되었다.

이처럼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 죽으신 예수님을 유다인들은 능멸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들어 올려진 왕’ ‘십자가에서 통치하는 왕’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죄명패는 하느님 사랑의 계시요 신앙의 승리를 드러내는 거룩한 표징이다.(1코린 1,18-31 참조)

I.N.R.I는 요한 복음서 19장 19절에 나온 주님의 죄명패를 축약한 문자이다.

 

주님의 죄명패를 마태오 복음서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HIC EST IESVS REX IVDAEORVM, 마태 27,37), 마르코 복음서는 “유다인들의 임금”(REX IVDAEORVM, 마르 15,26),

 

루카 복음서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HIC EST REX IVDAEORVM, 루카 23,38)라고 소개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도 요한 복음서의 십자가 죄명패를 그대로 따라 표기하고 있는데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 표기에 근거해 ‘I.N.B.I’(Ιησουs ο Ναξωραιοs ο Βασιλευs των Ιουδαιων)로 적고 있다.

한편, 「200주년 신약 성서 주해」는 ‘나자렛 사람’(Ναξωραιοs, 나조라이오스 또는 나조래오스)의 의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말은 우선 ‘나자렛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부수적으로 ‘나지르’를 뜻할 수도 있다.

 

나지르란 적어도 30일 이상 삭발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기로 서원한 사람이다.

 

구약의 가장 대표적인 나지르는 삼손(판관 13,2-7)이다. 마지막으로 나조라이오스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네세르), 곧 메시아를 가리킬 수도 있다.”

 

리길재 기자(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