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1909, 축일 1월 15일
‘온 세상에 복음 전파’… 세상 끝날까지 선교는 이어져야 합니다
선교 신학교 건립해 선교사 양성
현재 세계 100여 곳 양성소로 성장
인쇄소 열어 문서 선교 본격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
“복음 선포 사명의 가치 증거한 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2003년 10월 5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청에서 열린 아놀드 얀센 신부의 시성식 강론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 전에 남긴 말씀으로 시작했다.
이전에는 우리가 닿을 수 있는 ‘온 세상’에 한계가 있었지만,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교통과 매체의 비약적인 발달로 세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직접 혹은 매체를 통해 ‘온 세상’에 갈 수 있게 됐다.
성 아놀드 얀센 신부(이하 얀센 성인)는 이런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복음 선포를 위해 앞장 선 성인이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얀센 성인은 1837년 독일 라인강변에 위치한 작은 도시 고흐(Goch)에서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자녀들이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아버지와 매사에 기도와 함께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얀센 성인은 자연스럽게 신앙을 체득해나갔다.
특히 본당 보좌였던 루이터 신부는 열정적인 신앙심과 검소한 생활방식으로 어린 얀센 성인의 성소에 큰 영향을 줬다.
그러나 성소의 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얀센 성인은 소신학교 졸업 후 뮌스터의 보로메오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당시 주교의 권고로 신학 수업을 중단하고 중등교사자격을 위해 본(Bonn) 대학을 가야만 했다.
1859년 얀센 성인이 교사자격시험에 합격하자 상당한 보수를 제시하며 교사직을 제안하는 곳도 있었다. 22세 청년에게 큰 유혹일 수 있었지만, 얀센 성인은 흔들림 없이 사제의 길을 택했고, 1861년 사제품을 받았다.
얀센 성인은 보홀트에 있는 한 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여기서 얀센 성인은 ‘기도의 사도직’을 만난다. 기도의 사도직은 매일 봉헌기도를 통해 하루 일상의 삶을 예수 성심께 봉헌하고 미사성제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일치함으로써 일상에서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가는 사도직 단체다. 기도의 사도직을 통해 예수 성심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해외 선교에 투신하고자 하는 열망이 점점 더 커져갔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얀센 성인이 평소에 늘 반복해서 강조한 말이다. 성인이 말하는 복음 선포는 ‘온 세상’을 향해 있었다.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얀센 성인이 주목한 것은 출판이었다.
그는 해외 선교를 위한 잡지를 구상했다. 그러나 아직 문서선교가 보편적이지 않던 당시 사람들은 얀센 성인의 생각을 ‘허황된 꿈’이라 일축했다.
얀센 성인은 주위의 부정적 의견에도 불구하고 잡지 출판 구상을 구체화시켜나갔고, 당시 뮌스터교구장이던 브링크만 주교를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
마침내 얀센 성인은 ‘예수 성심의 작은 사도’(Kleiner Herz-Jesu-Bote)라는 월간지를 발간했다. 이 월간지는 사람들이 예수 성심을 전하는 전달자가 되도록,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내린 사명, 복음 전파에 투신하는 선교 정신을 일깨우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성인은 이 월간지를 통해 선교가 다양한 민족들의 다양한 요청에 부응해야하며 지금 우리들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까지, 세상 끝날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얀센 성인이 발행한 월간지는 많은 이들의 선교 열망을 불렀다. 이런 열망이 모여 나가자 얀센 성인은 이전부터 생각해왔던 ‘선교 신학교’ 건립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선교 열망
얀센 성인은 주교들을 만나며 선교 신학교 건립 계획을 설명했지만,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문화혁명이 극심했던 시기로, 독일 정부는 신학교 설립을 금지하고 있었다. 독일 내 종교 활동 자체가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얀센 성인은 “새로 서품 받은 사제들이 더 이상 본국에서 일할 수 없게 됐다면, 해외 선교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며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봤다.
얀센 성인은 독일에 신학교를 세울 수 없다면 이웃나라에 세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성인의 뜻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고 1875년 네덜란드 슈타일에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를 설립했다.
얀센 성인은 신학교 설립에 그치지 않고 바로 인쇄소도 시작했다. 출판사업이 신학교와 해외 선교사는 물론 일반 대중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고 그 힘으로 더욱 효과적인 선교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얀센 성인과 함께 일하던 동료들조차도 이에 반대하며 큰 불화가 생기기도 했다. 사람들은 얀센 성인이 시작한 신학교와 인쇄소가 6개월도 못 버티고 시행착오와 경제난으로 파산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성인은 “새롭게 시작할 때 궁핍과 희생과 고통은 본질적인 것”이라면서 “하느님은 우리가 어려움과 시련을 견디어 낼 때 풍성한 축복을 주실 것”이라 말하며 흔들림 없이 선교사명을 수행해나갔다.
주위의 반대와 만류, 걱정에도 불구하고 얀센 성인의 사업은 성장해 나갔다. 선교 신학교는 요한 밥티스트 신부와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신부를 첫 선교사로 양성, 중국에 파견했다.
출판사도 번창해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문서선교에 함께했다. 이렇게 얀센 성인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선교 수도회인 ‘말씀의 선교 수도회’, ‘성령선교 수녀회’와 관상 수도회인 ‘영원한 성체조배 수녀회’ 등 수도회도 창설했다.
얀센 성인은 생전에 모두 5개의 선교 신학교를 설립했고, 지금도 세계 100여 곳의 양성소에서 얀센 성인의 뜻을 따르는 선교사들을 배출하고 있다.
또 오늘날 세계 65개국에서 6000여 명의 말씀의 선교 수도회 선교사들과 3500여 명의 성령선교 수녀들과 400여 명의 영원한 성체조배 수녀들이 얀센 성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2003년 성인의 시성식을 주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얀센 성인은 새로운 매체들, 특히 출판사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퍼뜨리며 열정적으로 성직을 수행했고, 어떤 장애도 그를 낙담시킬 수 없었다”며 “성인은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의 영원한 가치를 증거하며 지금도 천국에서 우리가 그 길을 충실히 따르도록 돕고 있다”고 전했다.
이승훈 기자(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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