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거장들 속에서 성장한 김세중은 ‘한국의 미켈란젤로’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청동의 녹 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 그 더운 가슴으로/ 영원의 사랑 안에 쉬다”
김세중(프란치스코, 金世中, 1928~1986) 1주기 추모비에 이어령이 쓴 글이다. 김세중은 실로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청동의 녹 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이었다.
그는 10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58년의 짧은 생에 비해 무척이나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다. 김세중은 우리나라 공공조각과 종교조각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로댕을 존경한 청년
김세중은 고등학교 때 문학과 연극 그리고 정치를 놓고 진로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시인 릴케가 지은 「로댕의 어록」을 읽게 되었다.
그 책에는 로댕의 조각 작품 사진과 함께 로댕이 남긴 말들이 담겨 있었다. 로댕은 청년 김세중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로댕과 같은 훌륭한 조각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릴케가 지은 「로댕의 어록」에서 김세중이 어떤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을지 찾아보았다. ‘예술가는 공부하지 않고 영감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정직한 노동자처럼 일에 온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예술가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예술가는 혼자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대중들의 눈길을 끌려고 억지로 무언가 할 필요는 없다’, ‘참다운 예술가란 모든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다’ 이러한 말들이 김세중을 예술가의 길로 인도했을 것이다.
릴케의 책에는 로댕의 작품이 흑백사진으로 여러 장 등장한다. 릴케는 자신의 독특한 시어(詩語)로 그 작품들을 예찬했다. 나는 한 장의 사진에 눈이 멈췄다. 스물세 살의 로댕이었다.
빛이 로댕의 어깨를 환히 비추고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꼭 다문 입에 눈빛은 예리하게 빛난다. 그 사진에 릴케는 이렇게 썼다. “세브르의 공장에서 일하던 이 젊은이는 꿈이 손으로 솟은 몽상가였다.
그는 꿈의 실현에 착수했다. 그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 있던 조용함이 그에게 현명한 길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그 젊은 로댕에게서 청년 김세중을 보았다.
김세중은 서울대 미대 조소과 1회 학생으로 입학했다. 김세중에게 조각을 가르쳐준 사람은 도쿄미술학교와 컬럼비아대학을 나온 김종영 교수와 조각가 윤승욱 교수였다.
김세중은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학생 신분으로 ‘청년’이란 작품을 출품해 특선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은 미대 학장이었던 장발(루도비코)이었다.
장발은 제자 김세중에게 미술은 물론 종교적인 면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김세중을 가톨릭으로 입교시킨 것도 장발이었고, 대부를 선 것도 장발이었다.
김세중은 장발의 깊은 신앙심과 훌륭한 인격에 감동해 재학 중에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사실 김세중의 부모는 불교 신자였다. 아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는 완강히 반대했다. 그래서 김세중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명동대성당 기숙사에서 무려 3년을 지냈다. 김세중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부모님은 오랜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나는 일치되지 않는 신앙이 괴로워서 잠시 집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명동성당 기숙사에 들어가 3년을 지냈지요. 새벽 종소리가 울리면 먼저 일어나 미사에 갔고, 아침을 먹고는 누구보다 먼저 학교로 달려가 저녁에 어두워질 때까지 작품에 몰두하는 구도자와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김세중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종교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유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피난지 부산에 서울미대 임시 강의실이 세워졌다. 대학원생이었던 김세중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경남 마산에 있는 성지여고에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국어 교사로 시인 김남조(마리아 막달레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다가 마침내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세중은 서울대 미대에 전임강사로 채용되었고 본격적으로 조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서울대 미대 학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하느님께 삶을 봉헌한 조각가
김세중의 종교 조각은 서울대 미대 교수들의 영향이 컸다. 김세중의 스승이자 대부였던 장발과 조각과 교수였던 윤승욱, 김종영, 이순석 모두가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서울대 미대가 우리나라 가톨릭 미술을 선도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김세중은 27세에 ‘자매 순교자’를 청동으로 조각했다.
자매 순교자는 기해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언니 김효임 골롬바와 동생 김효주 아그네스이다.
두 자매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언니는 손에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을 들고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있고, 동생은 십자가를 왼손에 들고 하늘을 힘차게 올려다보고 있다.
높이가 177㎝의 청동이 주는 무게감과 질감 그리고 종교적 영성이 한데 어우러져 매우 비장한 느낌을 준다.
장발은 오래전에 ‘골롬바와 아그네스’라는 성화를 제작한 바 있다. 김세중의 ‘자매 순교자’는 스승의 성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전문가들은 김세중의 종교 조각은 중세 유럽의 교회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당시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김세중은 서양에서 들여온 미술 서적을 통해 유럽 중세 조각을 많이 연구했을 것이다.
서울 혜화동성당의 전면에 화강암으로 조각된 ‘최후 심판도’는 장발이 주도했는데 그 작업에 김세중이 참여했다. 180여 개의 화강암을 붙인 부조는 김세중이 원도(原圖)를 만들었고 몇 사람과 함께 조각했다.
가운데 예수님은 오른손을 들어 심판하는 모습이고 양쪽의 네 사도(복음사가)를 상징하는 사자(성 마르코), 독수리(성 요한), 천사(성 마태오). 황소(성 루카)는 각각 날개를 달고 있다.
예수님이 옥좌에 앉아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 오른손을 치켜든 모습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 속의 예수님을 연상시킨다. 부조의 선과 면은 굵고 단순하며 강하다.
화강암이 주는 강한 질감과 돌출시킨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느님 말씀을 힘차게 선포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혜화동성당은 김세중의 가톨릭 조각 작품이 모여있는 작은 미술관이다.
김세중이 가장 많이 남긴 종교 조각은 ‘성모상’과 ‘성모자상’이다. 가톨릭대의 ‘평화의 모후’와 ‘성모상’, 계성여고의 ‘성 마리아’, 세종로교회의 ‘동정 마리아’,
원효로교회의 ‘영광의 마돈나’, 반포성당의 ‘성모자상’, 가톨릭미술전의 ‘성모자상’, 성 라자로 마을의 ‘피에타상’, 구산성당의 ‘성모상’, 도림동성당의 ‘성모상’, 서교동성당의 ‘성모상’, 바티칸미술관의 ‘성모상’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가톨릭 조각 작품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명수대성당의 ‘성심상’, ‘십자가의 고난’, ‘그리스도’, 혜화동성당의 ‘최후의 심판도’, ‘성 베네딕도상’,
‘십자가’, 성 라자로 마을의 ‘새 삶의 예수상’, 가르멜수도회의 ‘십자가’, 서교동성당의 ‘십자고상’, 불광동성당의 ‘김대건 신부상’과 ‘십자고상’, 바티칸미술관의 ‘예수상’과 ‘14처’, 절두산성당의 ‘요한 바오로Ⅱ세상’ 등이 있다.
그밖에 가톨릭 건축물로 ‘천주교 순교 기념탑’과 절두산 성지 ‘순교 기념상’을 건립했다. 특히 ‘순교 기념상’은 순교한 성인들을 화강암에 새겨 넣었는데 태양 빛을 받으면 조각은 마치 청동처럼 빛나며 모든 순교 성인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일반대학 조각과 교수가 종교 조각을 이렇게 많이 제작한 것은 유례가 없다. 김세중은 미켈란젤로처럼 평생 가톨릭 작품을 만들며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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