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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8)제1차 갈릴레오 재판(1616년)

dariaofs 2023. 5. 19. 00:42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은 이단”이라는 교회에 순명 약속했지만…

지동설 옹호 말라는 교회 명령에
갈릴레오, 침묵하며 조용히 지내

 

고향 폴란드 토룬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동상.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릴레오가 심혈을 기울여서 쓴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의 의도와 달리 ‘무엄하게도’ 성경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하고 실제로 재해석할 권한이 일개 평신도에 불과한 그 자신에게도 있다는 생각을 암시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이 편지의 사본은 자유롭게 복사되고 회람되었기 때문에, 그 글을 읽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보기에 그는 오만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프로테스탄트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인상마저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갈릴레오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1615년 말에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가게 됩니다.

한편 다음 해인 1616년 1월에 교회법 학자인 프란체스코 잉골리 몬시뇰(Francesco Ingoli, 1578~1649)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De situ et quiete terrae contra Copernici systema disputatio)를 갈릴레오에게 보내게 됩니다.

이 글은 갈릴레오 이전 최고의 관측천문학자였던 티코 브라헤(Tycho Brahe·1546~1601)의 천문학적 모델(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철학적·신학적 이점과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기하학적 이점을 절충시킨 모델)에 기반하여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에 관해 무려 18가지나 되는 과학적 반론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후에 잉골리의 이 편지가 곧이어 벌어진 자신의 종교 재판(제1차 갈릴레오 재판)에 영향을 끼쳤다고 믿게 됩니다.

드디어 1616년 2월 19일, 교황청 검사성성(현 신앙교리부)은 코페르니쿠스 체계 문제에 관해 신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열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후 총 1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2월 24일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발표하였습니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정지해 있다는 주장은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터무니없으며,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따르면, 또한 거룩한 교부들 및 신학 박사들의 공통된 해석과 이해에 따르면, 여러 부분에서 성경의 의미에 위배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단적이다.’

 

또한, 지구가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고 운동을 한다는 주장은 ‘철학적으로 동일한 판단을 받으며, 신학적 진리에 관해서는 신앙에 있어서 적어도 오류가 있다.’”


바오로 5세 교황.김도현 신부 제공
 
 
다음날 바오로 5세 교황은 검사성성 추기경들과의 모임에서 벨라르미노 추기경에게 다음의 사항을 지시하였습니다.


“갈릴레오를 소환한 후,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포기하도록 명령하라. 만일 그가 순명을 거부하면 위원회는 이 내용을 가르치거나 옹호하는 것, 토론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하도록 명할 것이며, 그래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구속에 처해질 것이다.”


결국 갈릴레오는 다음날인 2월 26일 벨라르미노 추기경 앞에 소환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추기경은 그에게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전해 준 후,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완전히 포기하고 그것을 말이나 글로써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갈릴레오는 그 자리에서 순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후 3월 5일에, 갈릴레오 재판의 결과로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는 교황청의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오르게 됩니다.
 
그 후 「천구의 공전에 관하여」는 (태양계 모든 행성들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밝힌)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의 여러 서적들과 함께 200여 년 후인 1835년에야 비로소 금서에서 풀리게 됩니다.
 
결국 갈릴레오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과 성경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옴으로써, 지동설이 이단으로 규정되고 가톨릭이 더욱 보수적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말았습니다.

우르바노 8세 교황.김도현 신부 제공
 
 
그 후 갈릴레오는 1616년의 재판 결과를 수용하면서 드러나지 않게 조용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1623년 8월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Maffeo Barberini·1568~1644)이 우르바노 8세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갈릴레오의 삶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르베리니는 갈릴레오와 동향인 피렌체 출신으로서, 갈릴레오의 여러 성공적인 관측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1611년 이래로 갈릴레오의 연구를 존경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해 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제1차 갈릴레오 재판 후인 1620년에는 ‘위험한 찬양’(Adulatio Perniciosa)이라는 시까지 지어서 망원경을 이용한 갈릴레오의 발견들에 찬사를 표하기까지 했을 만큼 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각별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다음 해인 1624년에 우르바노 8세 교황을 찾아가서 여섯 차례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신중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으셨다. 하느님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게도 창조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증거가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지구는 반드시 움직여야만 한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하느님께서 다르게 하실 수 있는 전능에 제약을 가하는 일이 된다.”


교황의 이러한 주장에도 갈릴레오는 자신의 지지자인 교황과의 만남들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다시 옹호하는 활동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채 안심한 상태로 로마를 떠납니다.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간 후 그는 (1616년 당시에는 쓰지 못했던) 잉골리 몬시뇰에게 보내는 장문의 답신을 쓰는 것을 시작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기 시작합니다.

 

김도현 바오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