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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인들] (11) 성 바오로 6세 교황 (1897~1978)

dariaofs 2023. 6. 10. 00:01

축일 5월 29일

세상 속 교회 역할 제시하며 쇄신 이끌어 낸 개혁가
성 요한 23세 교황 후임자로 선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마무리
교회 쇄신·현대화 과업 수행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까지 이어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교회의 현대화를 이루어냈다.CNS 자료사진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현대세계에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동방교회와의 대화를 통해 교회일치의 토대를 세웠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성 바오로를 따라 경계를 넘어서 선포와 대화로 주님의 복음을 증거했고, 교회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 가난한 이들을 돌봤다.

 

공의회 이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한 사랑으로 겸손하게 예언자로서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의 현대화를 이룬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삶을 알아본다.

유능한 교회의 일꾼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세속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로 1897년 9월 27일 이탈리아 브레시아 인근 콘체시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르지오 몬티니는 변호사이자 의회 의원으로, 일간지 ‘일 치타디노 디 브레시아’의 편집장을 역임하며 반교회적 사상과 싸웠다. 모친 주디타 알기시는 교회 여성운동 지도자였다.

그는 수줍을 잘 타는 성격이었지만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다. 1903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에 들어갔지만 허약했던 탓에 여러 차례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하지만 1916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브레시아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후 밀라노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고 이후에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등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이어 1922년에는 교황청 외교관학교에 입학해 외교관으로서 자질을 키웠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외교관학교를 마치고 1923년 주폴란드 교황대사관에서 잠시 근무했지만, 건강 문제로 그해 로마로 돌아왔다.

 

이후 교황청 국무원에서 일하다 사제 본연의 일을 하고 싶다는 원의에 따라 1925년부터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FUCI)의 지도신부로 사목했다.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신앙과 문화 교육에 힘썼다. 이후 1931년 다시 교황청 국무원으로 돌아와 교황청 외교관학교에서 외교사를 강의했다.

1937년 당시 교황청 국무원 총리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됐고, 파첼리 추기경이 비오 12세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교황을 측근에서 보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교황의 지시로 포로 문제와 유다인 문제 등에 관심을 두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도왔다.

1954년 밀라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이들이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과 사회교리를 전했다. 또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그리스도인의 노조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
 
 
제2차 바티칸공의회 마무리와 결과 실행

1958년 성 요한 23세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된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의 임원직을 맡아 1962년 공의회 제1회기에 참석했다.
 
이후 1963년 성 요한 23세 교황 선종 후 후임자로 뽑힌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첫 교서를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계속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공의회는 1963년 9월 제2차 회기가 속개됐고, 1964년 제3회기를 거쳐 1965년 제4차 회기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교회의 개혁을 시작한 공의회는 성 요한 23세 교황이 소집했지만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공의회를 이어나가 끝맺었다. 공의회 진행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모국어 사용을 포함한 전례 개혁, 현대 세계의 교회, 평신도 사도직, 주교들의 단체성, 교회 일치, 타종교와의 관계 등의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편과 변화를 거부하는 편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끈기와 인내, 의지로 교회 쇄신이라는 과업을 이끌어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반포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해 나갔다.
 
1964년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해 정교회 수장이었던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만나 그리스도교 일치에 앞장섰고, 1965년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 세계주교시노드를 제정했다.
 
또 재임 기간 중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렸다. 교황 선출 당시 약 80명에서 1976년에는 138명으로 늘었다.
 
추기경단에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자 노력했고,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인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서임했다.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을 선포한 ‘순례자 교황’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다섯 개 대륙을 모두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당시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여행한 교황으로 ‘순례자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64년 세계성체대회 개최지인 인도 뭄바이를 방문해 최초로 아시아 땅을 밟은 교황이 됐으며, 이듬해에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사목방문했다.
 
1968년에는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를 방문해 보고타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와 메데인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아메리카주교단 총회에 참석했다. 1970년에는 홍콩과 필리핀, 호주를 찾았다.

또한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대표 문헌으로는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재확인한 회칙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공동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제안한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부부 관계와 정결의 가치,
 
올바른 자녀 출산을 위한 부모와 의료인과 사목자의 역할을 설명한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현대 세계에 부응하는 선교의 방향을 논한 「현대의 복음 선교」(Evagelii Nuntiandi, 1976) 등이 있다.

1978년 8월 6일 교황 별장인 카스텔 간돌포에서 미사 주례 중 심장마비로 선종한 성 바오로 6세는 2014년 시복됐다.
 
이후 2018년 10월 14일 자신이 창립한 세계주교시노드가 열리는 중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미사 강론에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바오로 사도처럼 새로운 경계를 넘어서, 복음 선포에서나 대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됐다”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외향적인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보냈다”고 밝혔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기념일은 5월 29일이다. 보통 성인의 선종일이 기념일이 되지만, 그의 선종일 8월 6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것을 고려해 그가 사제품을 받은 날로 정해졌다.


1967년 6월 26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왼쪽)이 카롤 보이티와 대주교(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를 추기경으로 서임하는 모습.CNS 자료사진

 

최용택 기자(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