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7월 9일
고통받는 이들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며 헌신적 사랑으로 응답
암 투병 중인 여성 돌봄 시작으로
브라질교회 첫 방인 수도회 창립해
평생 병들고 가난한 이들 위해 투신
고통받는 예수 성심의 성 바울리나 수녀(Mother Pauline of the Agonizing Heart of Jesus)는 브라질 교회의 첫 성인으로 원죄 없으신 잉태의 작은 자매회(Congregation of the Little Sisters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공동 창립자다.
평생 병들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으며, 역경 중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살았다. 말과 행동으로 위로자이신 성령의 활동을 보여준 고통받는 예수 성심의 바울리나 성녀의 삶을 들여다본다.
신심이 깊고 자비심 많았던 소녀
고통받는 예수 성심의 바울리나 수녀(이하 바울리나 수녀)의 세속명은 아마빌레 루치아 비신타이네르(Amabile Lucia Visintainer)로 1865년 12월 16일 지금은 이탈리아 트렌토 지역,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티롤 지역 비골로 바타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토니오 나폴레오네 비신타이네르와 어머니 안나 피아네체르는 가난했지만 열심한 가톨릭신자였다.
1875년 9월 바울리나 수녀의 가족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브라질의 산타 카타리나주로 이주했다. 이주민들은 브라질 현지에서 오늘날의 노바 트렌토(Nova Trento) 지역을 개척, 비골로(Vigolo) 마을을 건설했다.
바울리나 수녀는 어릴 적부터 신심과 동정심이 깊었다. 줄곧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규 학교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가톨릭 신앙에 충실했고, 주변의 고통받고 가난한 이들을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며 도왔다.
12살 무렵 첫영성체를 한 바울리나 수녀는 본당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병자들을 방문해 위로했으며, 비골로공소 경당 청소도 도맡아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투신
1890년 7월 바울리나 수녀는 친구인 비르지니아 니콜로디와 함께 암 투병 중인 한 여성을 돌봤다. 바로 원죄 없으신 잉태의 작은 자매회의 시작이었다. 바울리나 수녀는 예수회 사제였던 루이지 로시 신부의 지도 아래 봉헌생활에 투신했다.
바울리나 수녀와 비르지니아는 지역 공동체로부터 기부 받은 한 집에 머물며 암환자를 돌봤고, 수도회의 생활 규칙에 따라 생활했다. 이듬해 환자가 죽은 뒤에는 테레사 안나 마울레가 공동체에 들어왔다.
1895년 바울리나 수녀와 로시 신부는 공동체에 들어오려는 여성들이 많아지자 공식 수도회 설립을 결정했다.
이로써 원죄 없으신 잉태의 작은 자매회가 설립됐다. 쿠리티바교구장 조제 데 카마렝구 바로스 주교가 수도회 설립을 승인했고, 그해 12월 바울리나 수녀와 비르지니아, 테레사는 서원했다.
이때 바울리나 수녀는 ‘고통받는 예수 성심의 바울리나’를 수도명으로 선택했고, 그의 이름이 됐다.
원죄 없으신 잉태의 작은 자매회는 브라질교회의 첫 방인 수도회로, 바울리나 수녀를 비롯한 동료 수녀들의 모범적인 삶과 사도적 열정은 많은 성소를 낳았다.
여전히 가난했고 수도회 시설 등 공동체로 지내는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수도회는 산타 카타리나주에서 빠르게 성장했고, 바울리나 수녀는 1903년 수도회의 첫 총원장이자 종신 총원장으로 선출됐다.
수도회 총장이 된 바울리나 수녀는 노바 트렌토를 떠나 상파울루의 이피랑가 지역으로 수도회를 옮겼다. 바울리나 수녀는 이곳에서 도시의 고아와 노예의 자녀들, 늙고 버려진 노예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브라질에서 노예제도는 1888년에 폐지됐고, 당시 나이든 노예들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버려져 쓸쓸한 죽음을 맞고 있었다.
기도와 봉사로 시련 이겨내
하지만 1909년 바울리나 수녀의 삶에 시련이 다가왔다. 수도회 안에 생긴 분란으로 당시 상파울루대교구장 두아르테 레오폴도 데 실바 대주교는 바울리나 수녀에게 총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바울리나 수녀는 총원장에서 물러나 브라간사파울리스타의 ‘산타 카사’의 병자들과 성 빈센트 드 폴 호스피스의 노인들을 돌봤다.
고된 일과 기도밖에 할 수 없던 시기였지만 바울리나 수녀는 수도회가 지속되기 위한 일로 여기고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였다. 수도회의 활동을 통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918년 후임 총원장 비센시아 테오도라 수녀는 두아르테 대주교의 허락을 받고, 바울리나 수녀를 이피랑가의 모원으로 다시 불렀다. 바울리나 수녀는 이곳에서 기도하고 노쇠한 수녀들을 돌보며 은수의 삶을 살았다.
1933년 5월 19일 교황청은 원죄 없으신 잉태의 작은 자매회를 교황청립 수도회로 인준하며 바울리나 수녀를 ‘칭송받을 설립자’로 인정했다.
이어 1940년 수도회 설립 50주년을 맞아 바울리나 수녀는 회원들에게 “언제나 겸손하고, 주님의 섭리를 믿고 따르라”면서 “역풍이 불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말고, 주님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의지하며 충실하게 앞을 향해 나아가라”고 영적 충고를 했다.
바울리나 수녀는 1938년부터 당뇨를 앓았다. 당뇨 합병증으로 처음에는 오른손 손가락, 그 다음에는 오른팔을 잃었다. 그리고 시력도 잃었다. 1942년 7월 9일 선종한 바울리나 수녀는 “주님의 뜻은 이뤄진다”는 유언을 남겼다.
노바 트렌토 사람들은 바울리나 수녀를 ‘간호사’로 불렀다. 바울리나 수녀의 삶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봉사였다. 또 수도회의 성장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두아르테 대주교가 그를 총원장에서 물러나게 했을 때, 바울리나 수녀는 겸손하게 수도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일반 수녀로 내려와 기도와 봉사로 수도회가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 수도회를 통해 세상 속 사람들이 울부짖는 고통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기꺼이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2년 5월 19일 바울리나 수녀를 시성하며 “성령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바울리나 수녀의 삶과 사명을 통해 활동하셨는데,
그녀를 통해 수도회를 세우고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영적·물적으로 지원했다”면서 “그녀가 세운 수도회는 ‘다른 이를 위한’ 병원이 됐고, 위로자이신 성령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셨다”고 밝혔다.
최용택 기자(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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