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을 찾 아 서

[신앙단상] 당신의 믿음은 안녕하신가요?

dariaofs 2023. 9. 16. 00:15

엄마는 내 손에서 쪽파를 받아들며 절망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아이고! 저 탕약에 넣어야 하는데. 파 뿌리는 다 어디 갔어?”

부엌에서는 한약 다리는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마침 골방에서 콜록대는 할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나는 가슴이 덜컹거리고 눈물이 쿡 솟았다.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랬던 건데. 나는 돌아선 채 흐느끼고 말았다.

대여섯 살 때 내 별명은 ‘똑똑 새’였다. 그때는 심부름을 잘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재잘대는 게 시끄러워 부모님이 그런 별명을 붙여준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그날 엄마는 외갓집에서 쪽파를 얻어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넓은 마당을 가진 외갓집이 우리 일가라는 자부심과 외할아버지가 내 손바닥에 쥐여주는 새콤달콤 빨간 앵두가 좋아 내 심부름 사업이 절정에 달할 때였다.

그날 외갓집에서 쪽파를 받아든 나는 빨리 오라던 엄마 말이 생각나 마음이 급해졌다. 뛰어가면서 파를 다듬어 뿌리까지 말끔히 떼어버렸다.

 

임무를 두 배로 완수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랑스레 집에 도착한 순간, 쪽파를 받아든 엄마의 황당한 얼굴이라니! 헐떡거리는 나에겐 신경도 안 쓴 채 엄마가 말했다.

“다시 가서 새 파를 얻어오너라. 이번에는 절대 뿌리에 손대지 말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두 번째 심부름 땐 쪽파 뿌리의 시커먼 흙까지 다 안겨드렸다. 그제야 엄마는 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수고했다. 우리 똑똑 새!” 나는 그때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랜 세월 잊었던 쪽파에 대한 내 유년의 기억이 호주 텃밭에서 다시 꿈틀거린다. 여기서도 한국인에게 제일 중요한 채소는 김치용 배추와 파이다.

 

한 끼도 파를 넣지 않은 음식은 상상할 수도 없기에, 한국 시장에서 파를 사오면 하얀 살 쪽의 파 뿌리는 무조건 텃밭 행이다.

 

쨍한 햇살 아래 파 뿌리만 심어놓으면 사철 푸르고 싱싱한 파를 얻으니 넘치는 자연의 신비요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이다.

텃밭의 쪽파에 정성스레 물을 주다 보니 돌아가신 엄마가 떠오른다. 파에 들이는 정성처럼 엄마 맘에 들려고 노력했는데 언제부턴가 엄마에게 소홀했다.

 

어른이 되어가며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욕심도 잊은 채 내 가족, 내 새끼만 챙겼다. 코로나 때문이라며 엄마의 장례 때 찾아뵙지도 못했다.

 

달리면서까지 엄마를 위해 쪽파 뿌리를 다듬던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엄마가 살아오신다면 이 겨울 파 뿌리 잔뜩 넣어 따끈한 생강차를 대접할 텐데….

성당의 저녁 종소리가 무심한 내 양심을 자꾸만 건드린다. ‘뎅~뎅~’ ‘뎅~뎅~’

‘주님, 제가 요즘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 애쓴 적이 있던가요?’

화살기도만으로 엄마를, 병석의 지인을 기억해준다고 자부했던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내일은 김밥을 싸서 동네에 홀로 사는 호호백발 헥터 할아버지를 찾아봐야겠다. 반가워 달려 나오는 헥터의 주름 위로 함박웃음이 배꽃처럼 너울거린다.

어느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항상 당신 자신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분이셨기에.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갈 용기와 건강을 주셔서요. 야고보서 2장 22절과 함께해요.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 필자 약력

이마리(마리아 앵죠, 필명) 정환 작가는 아동청소년소설가로, 목포 신인문학상, 한우리문학상, 부산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 동화 「버니입 호주 원정대」, 「구다이 코돌이」, 「코나의 여름」 등 세 권이 세종 우수도서로 선정돼 주목받았다.

동화 「빨강 양말 패셔니스타」, 「캥거루 소녀」도 썼으며, 청소년 역사소설로 신유사옥 이야기를 다룬 「대장간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 「동학소년과 녹두꽃」, 「소년 독립군과 한글학교」, 동호인 수필집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을 펴냈다.

현재 「한국전쟁과 소녀의 눈물」 출간 작업 중이며,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청소년소설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