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9월 5일
가난·외로움 속에 죽어가는 이들 위해 일생 바친 ‘빈민들의 종’
1928년 18세에 수녀회 입회한 후 인도행
콜카타 빈민들 위해 직접 거리로 나서
노벨 평화상 수상… 한국도 세 차례 방문
인도 콜카타에서 평생 가난한 이들을 섬겼던 ‘성 마더 데레사’ 수녀의 본래 이름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다. 마더 데레사라는 이름은 성인이 활동하던 인도 사람들이 그녀를 ‘마더’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한국 신자들에게도 마더 데레사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흔히 ‘콜카타의 성 마더 데레사’라고 불리는 것은 성인이 주로 활동했던 곳이 인도 콜카타였기 때문이다.
마더 데레사 성인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거칠고 주름 잡힌 얼굴과 손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자들을 위로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시대에 커다란 감명을 준 마더 데레사의 헌신적 삶과 신앙을 알아본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물려받아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 영토였던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었던 부모에게서 신앙심을 물려받은 마더 데레사는 초등학교 재학 때부터 신심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한 통의 편지를 읽고 인도로 향하게 됐다.
인도 콜카타에서 전교하기 위해 떠난 예수회 회원들이 1925년 12월 인도 벵골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적어 유고에 있는 신심단체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신심단체 회원들이 돌려가며 읽게 됐고 그 중 한 명이 마더 데레사였다. 본래 수도생활을 꿈꾸고 있던 마더 데레사에게 이 편지는 수도회 입회를 앞당기도록 이끌었다.
그 후 콜카타에서 전교하고 있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와 연락을 주고받게 되면서 1928년 입회했다. 이때 성인의 나이 18세였다. 1929년 인도에 도착해 히말라야 산맥 근처에 있는 다르질링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1931년 첫 서원을, 1937년 종신서원을 했다. 첫 서원을 하면서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를 자신의 수도명으로 택했다.
첫 서원을 할 무렵부터 마더 데레사는 콜카타에 있는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고 1944년에는 교장이 됐다.
1948년까지 콜카타 성모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학교생활과는 너무나 다른 콜카타 빈민들의 생활상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마더 데레사가 학교 안에만 머물렀다면 지금의 마더 데레사라는 존재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1946년 9월 피정을 위해 다르질링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이었고 특별한 은총이었다.
마더 데레사는 수도회 입회 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학교 안에서 누리던 안락한 생활을 떨쳐 버리고 1948년 가난한 이들 안으로 들어갔다.
마더 데레사는 성모여고를 떠나면서 “부유한 이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가난한 사람, 외롭게 죽어 가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는 퇴임 인사를 남겼다. ‘빈민들의 종’이 되겠다는 결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가난한 이들 속으로
마더 데레사는 1948년 콜카타의 빈민촌으로 들어가 거리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생활이었다.
성인이 성모여고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성인의 활동에 동참하기를 간청해 제자 12명이 1949년 처음으로 같이 일하게 됐고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마더 데레사의 활동은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통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마더 데레사의 지도로, 상처와 온갖 질병으로 뒤범벅이 돼 아무도 접근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
몸을 가릴 천 조각 하나 없이 버림받은 사람들, 먹을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 곧 죽을 줄 알면서도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가정이 되고자 했다.
마더 데레사는 자신과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활동은 사회 자선단체나 봉사단체와는 달라야 한다고 여겼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성인에게 중요한 것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웃이 되는 것뿐이며, 가난한 이들은 도움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그리스도였다.
이웃을 돕는 활동이 하느님의 사업이라면 사회 자선단체의 방법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으로 실현돼야 한다고 확신했다.
마더 데레사는 사랑의 선교 수녀회 수도자들의 신원에 대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신앙인이지 사회사업가도, 교사도, 간호사도, 의사도 아니다”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가난한 이들 안에 실재하시는 그리스도께 봉사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이 성인의 신념이었다.
선종과 시복시성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신의 결과로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으며 그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노벨 평화상을 받기 전과 후에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성인은 한국교회와도 인연이 깊어 1980년대에 세 차례나 방한했다. 1981년, 1982년, 1985년 한국을 찾았는데 1981년 5월 김포공항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마더 데레사의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환영 인파와 취재진이 워낙 많이 몰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성인의 ‘경호원’ 역할을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신을 끝까지 멈추지 않다가 1997년 9월 5일 인도 콜카타에서 ‘와서 나의 빛이 되어 다오’라는 그리스도의 간청에 응답하며 8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성인은 선종 6년 만인 2003년 10월 19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3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고, 2016년 9월 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마더 데레사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인도 콜카타의 빈민들, 그의 고향 북마케도니아 스코페 주민들도 TV 화면으로 시성식 장면을 보며 감격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에서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 자비를 풍성하게 나눠준 분, 인간 생명을 지킨 자애로운 성인”이라고 칭하며 “마더 데레사는 빈곤을 초래한 이 세상의 힘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절감할 것을 말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교황은 아울러 “마더 데레사의 성스러움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깝고 다정하기에 ‘성 데레사’보다는 계속 ‘마더 데레사’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박지순 기자(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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