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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인들] (19)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1887~1968)

dariaofs 2023. 10. 11. 00:24

‘오상’의 고통 겪으면서도 모든 이 환대하고 하느님 자비 전해

축일 9월 23일
미사로 신자들 영적 충만함 주고
고해성사로 회개의 삶 살게 도와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CNS 자료사진


‘오상(五傷)의 비오’ 혹은 ‘파드레 비오’로 잘 알려진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는 이탈리아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자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입으신 오상을 지녀 유명해졌지만,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는 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열정적으로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1971년 카푸친 작은형제회 장상과의 만남에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비오 신부가 명성을 얻고 신자들이 주위로 몰려든 이유는 겸손하게 미사를 봉헌하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생을 예수님 오상의 고통을 견디며 기도했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의 삶을 알아본다.


2002년 6월 17일 거행된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 시성식 전경.CNS 자료사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09년 6월 22일 산 조반니 로톤도를 방문해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를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CNS 자료사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8년 3월 17일 산 조반니 로톤도 감사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방문해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 유해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CNS 자료사진


■ “수염 있는 수도자가 되고 싶어요”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의 속명은 프란체스코 포르지오네(Francesco Forgione)다. 프란체스코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부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그라치오와 어머니 마리아 주세파는 가난한 소작농이었지만 자녀들과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밤에는 묵주기도를 바쳤다. 부모는 글을 몰랐지만 성경을 외울 정도로 신심이 두터웠고, 자녀들에게 자주 성경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프란체스코는 어릴 적부터 신심이 깊었다. 성가 부르기와 ‘미사 놀이’를 하며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열 살 즈음부터 사제의 꿈을 키웠다.

 

당시 구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마을을 방문했던 한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자의 모습에서 거룩함을 발견했고, 아버지에게 “수염 있는 수도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처음에 그의 부모는 반대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란체스코는 가정 형편 때문에 공립학교를 3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이 정도 교육만으로 카푸친 사제가 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 그라치오는 아들의 교육비를 벌기 위해 남미와 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프란체스코는 1899년 첫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과외 수업을 통해 수도회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학문적 지식을 쌓았다.

1903년 프란체스코는 모르코네에 있는 카푸친 수련소에 들어갔다. 그해 1월 22일 착복식을 하며 ‘피에트렐치나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905년 유기서원을 한 뒤, 여러 지역의 수도원을 거치며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1907년 종신서원을 했다. 이후 신학 공부에 전념했으며, 23살이던 1910년 8월 10일 사제품을 받았다.

비오 신부는 피에트렐치나에 있는 천사의 모후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비오 신부는 상태 악화로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피에트렐치나의 집에서 부모와 함께 6년을 머물러야 했다. 그는 고열 외에도 천식성 기관지염을 앓았으며, 신장 결석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1916년 비오 신부는 이탈리아 포르지아주 산 조반니 로톤도에 있는 은총의 성모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잠시 동안 했던 군복무 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 수도원에서 지내며 소신학교 학생들 영적 지도자와 고해사제로 활동했다.


2008년 4월 24일 산 조반니 로톤도 소재 감사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공개된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 유해.CNS 자료사진



순례자들이 2016년 2월 4일 자비의 희년을 맞아 로마로 이송된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CNS 자료사진


■ 예수님의 오상

비오 신부에게 예수님의 오상이 처음 나타난 것은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이었다. 두 손에 작은 동전만한 크기로 빨간색 상처가 나타났다.

 

너무 아팠고, 특히 왼손의 통증이 더 컸다. 1915년부터는 상처가 더 두드러졌다. 비오 신부는 주님께 이 상처들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고, 얼마 동안 사라졌다.

 

하지만 1918년 9월 20일 다시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이 찍혔다. 상처에서는 피가 났고, 목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는 더 심해졌다. 이후 비오 신부는 아물지도 덧나지도 않는 오상의 고통을 50년 동안 겪게 됐다.

비오 신부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산 조반니 로톤도의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중에는 비오 신부의 오상을 살피려 드는 의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비오 신부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비오 신부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로부터 정식 권한을 받은 조사관들도 있었다.

 

비오 신부를 떠받드는 광신자들의 행동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한 조사관은 비오 신부가 교황청의 허가증이 없으면 상처를 보여줄 수 없다고 거부하자 화가 나 “비오 신부는 사람들의 맹신을 이용하는 무식하고 자학적인 사이코패스”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비오 신부에 대한 여러 부정적인 보고서들이 교황청에 제출됐다. 교황청은 1931년 5월 비오 신부에게 고해성사와 신자들과의 미사 집전을 금지시켰다.

 

비오 신부는 거짓 고소와 진실 왜곡, 부당한 사목활동 규제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이 모든 조치를 따랐다. 비오 신부는 모든 규제가 철회될 때까지 교회와 장상들 명령에 끝까지 순명했다.

비오 신부에 대한 제재는 1933년과 1935년 사이에 모두 해제됐다. 비오 신부는 오해가 풀리기까지 3년 동안 격리된 상태로 미사와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비오 신부는 생애 대부분을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보내며 기도와 미사, 고해성사에 온전히 헌신했다. 성인은 “우리는 책 속에서 하느님을 찾지만,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며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설명하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인은 미사에 참례한 이들이 영적으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고해성사 때는 그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 보고 때로는 거칠게 대하면서까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성인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1956년 ‘고통을 더는 집’이라는 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960년대, 비오 신부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돼 갔다. 1968년 9월 22일 그는 건강 악화로 매우 지친 상태에서도 자신이 오상을 받은 지 50년을 기념하는 장엄미사를 주례했다.

 

이 미사는 비오 신부가 주례한 마지막 미사였다. 이튿날 새벽,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를 받고 서원을 갱신했다. 그리고 병자성사를 받았다.

 

새벽 2시30분경 “두 명의 어머니를 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선종했다. 두 명의 어머니는 자신의 생모와 성모 마리아였다.

선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오 신부의 시복시성 운동이 시작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9년 그를 시복하고 2002년 6월 16일 시성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 유학시절인 1948년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비오 신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비오 신부의 시성식 강론에서 “비오 신부는 모두를 환대하고 영적으로 지도하며, 특히 고해성사 집전을 통해 주님의 자비를 전했다”면서 “사제들이 그를 모범으로 삼아 오늘날 더욱 중요해진 고해성사의 기쁨과 고해성사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산 조반니 로톤도 감사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한 신자가 성 비오 신부 동상을 만지고 있다.CNS 자료사진

 

최용택 기자(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