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찬란한 별, 영화같은 삶을 살다
국산영화상(대종상 전신) 여우주연상(‘다정도 병이런가’), 국산영화상 여우주연상(‘어느 여대생의 고백’), 국산영화상 여우주연상(‘성춘향’), 대종상 여우주연상(‘상록수’),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대종상 여우주연상(‘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대종상 여우주연상(‘민며느리’), 청룡영화제 인기스타상,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특별감독상(‘돌아오지 않는 밀사’),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소금’),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
이렇게 수많은 영화상을 받은 사람은 최은희(데레사, 崔銀姬, 1926-2018)이다. 최은희의 삶은 자신의 말대로 ‘영화와 같은 반세기의 삶’이었고, ‘영광과 시련과 모험으로 가득 찬 삶’이었다.
최은희는 경기도 광주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서울로 이사 왔다. 부친은 구한말 군인이었다. 일본군이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군대를 떠났다. 그러고는 광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용산전화국에 취직했다. 평생 전화국 공무원으로 살았다. 어느 날,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전화국이 주최한 공연이 있었다. ‘심청전’이었는데 부친이 심봉사로 출연했다. 최은희는 깜짝 놀랐다. 부친이 무대에 설 줄은 전혀 몰랐다.
분장한 부친의 모습은 신기하면서도 부끄러웠다. 최은희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기예학교에 다녔다. 빨리 사회로 나가고 싶어 공부를 그만두었다. 동네에서 방공 연습(전투기 폭격을 피해 방공호로 대피하는 훈련)을 하다가 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와 함께 서울 종로에 있는 극단 사무실을 찾아갔다.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다행히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고, 배우 시험도 보아 연극협회 회원증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최은희는 무대에 서게 되었다.
데뷔작 연극 ‘청춘극장’ 성공적
데뷔작은 ‘청춘극장’이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부친의 역정이 대단했다. 당시 사람들은 연극인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최은희는 부친을 설득했다.
연극을 하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며,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러한 말은 소용이 없었다. 부친은 딸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 최은희는 혼자서 연극 공부를 했다.
연극계 한 선배가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러시아 연극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 수업」이었다. 그 책을 공부하면서 매우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감동적인 연기는 맡은 배역과 하나가 되어야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최은희의 평생 연기철학이 되었다.
촬영 기사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고통
해방이 되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이름을 바꿨다. 어렸을 때 이름인 최경순을 ‘최은희’로 개명했다. 그 이름은 당시 인기 소설의 여주인공이 ‘은희’였기에 좋아서 택한 것이었다.
최은희는 극단 토월회 연극을 시작으로 여러 공연에 출연했다. 그러다가 영화에 출연했다. ‘새로운 맹세’라는 영화였다. 영화 촬영하면서 엔지(NG, no good)가 많이 났다. 영화는 연극과 달리 필름으로 실시간 촬영했다.
영화는 연기자의 표정 연기가 중요했다. 제대로 된 표정이 안 나오면 다시 찍어야 했다. 필름 값은 비쌌다. 그래서 촬영 중간에 엔지를 많이 낼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끝나면 대사를 녹음했다. 입 모양을 맞추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영화를 촬영하다가 한 촬영 기사를 알게 되었다. 나이가 최은희보다 한참 많았다. 그는 결혼도 했었고 아이도 있었다. 최은희에게 끈질기게 구애했다. 최은희는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모친은 울면서 말렸다.
끝내 결혼식에 부친은 오지 않았다. 서울 남산동에 방 하나를 얻었다. 평범한 주부처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극단에 다시 들어갔고, 라디오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이때부터 그 남자의 손찌검이 시작됐다. 폭력은 점점 심해졌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면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가족 돌보려 6·25 전쟁 때 피난 안 가
6·25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최은희는 가족을 돌보려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대 협주단에 들어갔다. 식량을 배급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협주단에는 많은 예술인이 있었다. 명동대성당에 협주단이 있었는데 낮에는 연극 연습을 하고 밤에는 사상 교육을 받았다. 북한군은 종교는 아편이라며 모든 성경을 불태워버렸다.
어느 밝은 달밤에 성당에서 영화를 보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에 반짝이는 그 무엇이 있었다. 주워보니 십자가였다. 최은희는 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닥에서 짓밟히고 있는 십자가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품에 넣었다.
그 십자가를 오랫동안 지니고 다녔다. 국군이 북진하기 시작했다. 북한군 행군 대열에서 협주단은 이탈했다. 그러다가 국군과 마주쳤다. 국군에게 협주단에 들어가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국군 정훈공작대에 편성되었다. 공작대는 위문 공연하는 부대였다. 얼마 전까지 북한군 옷을 입고 공연을 하더니 이제부터는 국군 옷을 입고 공연해야 했다.
신 감독과 둘만의 쓸쓸한 결혼식
전쟁이 끝났다. 부산에서 ‘춘향전’을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한 지인의 소개로 신상옥(시몬) 감독을 만났다. 그는 천진난만한 소년 같았다. 신상옥은 최은희가 연극을 하면 꼭 보러왔다.
어느 날, 최은희는 역사극을 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졌다. 심신이 쇠약한 상태였는데 무리하게 연기하다가 쓰러진 것이었다. 신상옥은 최은희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때부터 최은희는 신상옥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가슴 속에 지니게 되었다. 신상옥은 최은희의 아픈 과거까지 모두 감싸며 사랑했다. 둘만의 쓸쓸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상옥과 처음으로 만든 영화가 이광수 원작의 ‘꿈’이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조신이라는 승려가 태수의 딸 달례를 보고 연모하다가 결혼했다. 함께 멀리 도망가서 아이를 낳고 살았다.
그런데 달례와 결혼 약속을 했던 화랑 모례가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결국 그들을 찾아냈다. 모례가 조신을 죽이려고 칼을 내려쳤다.
그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곳은 법당 안이었다. 최은희는 주인공 달례 역을 맡았다. 신상옥은 최은희를 연기자로 존중하며 진정으로 사랑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영화를 찍었다. 특히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대박이었다. 최은희는 이 작품을 가장 아꼈다. 최은희의 역할은 변호사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박사까지 찾아가 자문을 받았다.
그 영화로 최은희는 제1회 국산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 부부는 신필름을 설립했다. 한국 영화의 큰 획을 긋는 작품들이 그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로맨스 빠빠, 성춘향,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이, 다정불심, 내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이조 여인 잔혹사’ 등등. 나는 어렸을 때 인천 영화관에서 신영균 주연의 ‘연산군’과 ‘빨간 마후라’, 김진규 주연의 ‘다정불심’, 신성일 주연의 ‘내시’를 보았다.
오디션 통해 스타 신성일 발탁
신상옥은 문학을 좋아했다. 그래서 문학 작품을 영화로 많이 만들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심훈 원작의 ‘상록수’였다. 신영균과 최은희가 주연을 맡았다.
두 사람은 이 영화로 대종상 주연상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 영화를 보고 새마을 운동을 구상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렇게 한창 잘나가는 신필름에서 배우 모집 공고를 냈다.
1000명이 넘는 지원자가 오디션을 보았다. 광화문 일대가 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기마 경찰이 출동해 현장을 정리할 정도였다. 강신영과 앙드레 김이 최종적으로 합격했다.
신상옥은 강신영에게 ‘신성일’이란 예명을 지어주었다. 신성일(申星一)은 ‘뉴 스타 넘버원’이란 뜻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고의 청춘스타 신성일이 탄생했다. <계속>
'교회,문화,과학,군복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2) 최은희 데레사 (하) (0) | 2023.11.16 |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AI와 교회 (6)AI의 한계들① (0) | 2023.11.10 |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0) 안익태 리카르도 (하) (0) | 2023.10.31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AI와 교회 (5)AI의 장점들② (0) | 2023.10.28 |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9) 안익태 리카르도 (상) (0) | 2023.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