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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인들] (22) 성 마리아 베르틸라 보스카르딘 수녀(1888~1922)

dariaofs 2023. 11. 25. 00:29

아픈 이들 위해선 주저하지 않았던 ‘미운 오리 새끼’
축일 10월 20일


자신의 부족함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아픈 이들에게 헌신
감염 위험 무릅쓰고 결핵환자들 돌봐
전쟁 중에도 다친 군인들 곁에서 간호

이타적 사랑과 헌신 큰 반향 남기며
1961년 성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시성

 

성 마리아 베르틸라 보스카르딘 수녀 성인화.출처 pinterest


성 마리아 베르틸라 보스카르딘 수녀는 주님의 은총을 통해 자신 앞에 놓인 장애를 극복하고 고통받는 이들, 특히 환자들을 극진히 보살펴 명성을 얻었다.

 

지능이 뛰어나지도 않고 행동도 느렸지만 신앙 안에서 오직 주님의 딸로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성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아픈 이들을 돌본 마리아 베르틸라 보스카르딘 수녀의 삶을 알아본다.

‘미운 오리 새끼’

마리아 베르틸라 보스카르딘(Maria Bertilla Boscardin) 수녀의 어릴 적 이름은 안나 프란체스카였다. 안나는 1888년 10월 6일 이탈리아 베네토의 브렌돌라에서 가난한 농부의 네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젤로 보스카르딘은 알코올중독자로 시기심이 많았고 폭력적이었다. 때문에 안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에서 도망쳐야 하는 일이 잦았다.

안나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학교에 가는 날보다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거나 농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날이 더 많았다.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지능도 낮아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본당 신부는 그에게 ‘미운 오리 새끼’라는 별명을 주기도 했다. 행동이 느려서 생긴 별명이지만, 미운 오리 새끼처럼 당장은 놀림을 받더라도 나중엔 빛나는 백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특별했다. 성당에서 안식을 얻고, 기도하며 위로를 얻었다. 당시에는 첫영성체를 할 수 있는 나이가 12살이었지만, 그의 신심을 알아본 본당 신부는 그가 8살이었을 때 첫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12살에는 본당의 ‘성모 어린이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본당 신부는 당시 그에게 교리서를 선물로 주었는데 보스카르딘 수녀는 죽는 순간까지 그 교리서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수녀가 되고 싶었던 그는 한 수녀회에 입회를 요청했지만, 그녀의 굼뜬 행동 때문에 거부되기도 했다.

 

계속 여러 수도회의 문을 두드린 그녀는 1904년 비첸차에 있던 성 도로테아 수녀회에 입회했고, 이때 ‘마리아 베르틸라’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여기에 본당 신부의 도움이 있었다. 그는 안나가 굼뜨기는 하지만 수녀들이 먹을 감자를 깎을 수는 있다며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했다.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가 된 안나는 굼뜨고 똑똑하지 못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양성 담당 수녀에게 “저는 잘 할 수 있는 게 없는 불쌍한 미운 오리 새끼”라면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리아 베르틸라는 수녀회에서 3년 동안 주방과 세탁 일을 하며 지냈다.


이탈리아 비첸차 소재 성 도로테아 수녀회 성당 안에 모셔진 성 마리아 베르틸라 보스카르딘 수녀의 유해.CNS 자료사진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으로

그렇게 수녀회에서 궂은일을 하던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는 간호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된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는 트레비소에서 수녀회가 운영하던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병원 식당에서 일했지만, 나중에는 환자들도 돌보기 시작했다. 이후 어린이 병동을 담당했는데, 어린이 환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가 겸손하고 상냥하게 어린 환자들을 대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는 병원에서 일을 하며 진정한 성소를 찾았다. 평소에는 행동이 굼떴지만 아프고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간호하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어린 환자들을 돌보는 데 탁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는 전투에서 다친 이탈리아 군인들도 돌봤다. 공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과 함께했다.

 

아프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는 특히 어린이 환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 의료진도 그의 헌신에 감명했다.

병원에서 환자들과 함께한 그의 헌신을 간과한 한 수녀회 장상은 그에게 다시 세탁 일을 시켰다. 그렇게 넉 달 동안 순명한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결핵과 같은 전염병에 감염된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격리 병동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건강이 악화됐다. 이미 오랫동안 암을 앓고 있었던 그는 끔찍한 통증을 겪고 있었다.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그의 몸 속 종양이 커졌다. 수술을 받았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22년 10월 20일 선종했다.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다.


성 마리아 베르틸라 보스카르딘 수녀의 생가.CNS 자료사진


환자를 돌보며 주님께 헌신한 마리아 베르틸라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의 삶은 한 마디로 주님의 뜻에 순명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겸손하게 아픈 이들에게 헌신하며 열심히 봉사한 그의 삶은 당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낳았다.

 

그의 묘비에는 “영웅적 선익을 위해 선택된 영혼, 인간의 고통을 천사의 손길로 줄여준 이 여기에 잠들다”라고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묘소를 찾아 기도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그의 전구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퍼졌다.

결핵에 걸려 의사들도 희망을 포기한 한 어린이 환자가 있었는데 그의 부모가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에게 전구해 기적처럼 완치됐다는 이야기, 치료비가 없어 눈병을 치료하지 못하던 한 아이가 부모의 전구로 저절로 나았다는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1952년 6월 8일 비오 12세 교황은 그를 시복했고, 1961년 5월 11일 성 요한 23세 교황은 그를 시성했다. 시성식에는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의 환자였던 이들까지 참례해 그의 헌신적인 자선활동과 사랑을 기억했다.

 

‘미운 오리 새끼’라고 불렸던 가난한 농부의 딸. 그는 공습으로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의 곁을 지키고 간호했다.

마리아 베르틸라 수녀는 이타적인 사랑과 헌신의 힘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삶을 통해 진정한 사랑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감염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병동의 어린이 결핵환자들을 돌봤다. 그리고 결핵에서 비롯된 암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결핵환자들과 이들을 치료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이다.

이탈리아 비첸차 소재 성 마리아 베르틸라 보스카르딘 기념 성당.출처 위키미디어

 

최용택 기자(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