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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5) 길옥윤 요셉(상)

dariaofs 2023. 12. 7. 02:35

신혼여행 중 아내 패티 김과 총탄 쏟아지는 월남서 위문공연

 

파월 장병 위문공연 중인 패티 김과 길옥윤. 문화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 자료

 


오직 재즈, 재즈, 재즈
대학시절 재즈에 매혹 색소폰 연주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 공부
 밴드 만들어 일본 전역에 이름 알려

절망서 만난 ‘구원의 빛’ 
일본서 벌인 사업 망해 급히 서울로
패티 김 다시 만나 미친 듯이 곡 작업
전화로 ‘4월이 가면’ 들려주고 결혼

60·70년대 히트곡 제조기


“빛과 그림자, 서울의 찬가, 이별, 하와이 연정, 사랑하는 당신이,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제3한강교, 감수광, 사랑이란 두 글자,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당신만을 사랑해, 진짜 진짜 좋아해, 사랑은 영원히, 사랑의 세레나데, 서울이여 언제까지나, 새벽비, 옛사랑의 돌담길”

이 노래들은 우리나라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길옥윤(요셉, 1927-1995, 吉屋潤)이 대부분을 작사·작곡했다.

길옥윤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영변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곳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의사였다. 길옥윤도 후에 경성치과전문학교(현 서울대 치대)를 나왔으니 3대가 의사 집안인 셈이다.

 

길옥윤은 작은아버지 댁에 양자로 들어갔다. 작은아버지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후에 국회의장을 지낸 김재순을 만났다.

 

김재순은 졸업할 때까지 늘 1등이었고, 길옥윤은 늘 2등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는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고보)에 들어갔다.

평양고보 시절 문학과 음악 세계 매료

두 명의 교사가 길옥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 교사는 파우스트, 싯달타 등의 세계 명작을 빌려주며 길옥윤을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또 한 교사는 교련을 가르쳤는데 관악기를 잘 연주했다.

 

학교에는 브라스 밴드가 있었다. 여섯 명이 정원인데 한 명이 결원이었다. 그 교사는 그 자리에 길옥윤을 넣었다. 그래서 길옥윤은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수업을 마치면 대동강 강가나 만수대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평양고보를 졸업할 때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 입학원서를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광산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 냈다. 그런데 네 곳 모두 합격했다. 결국 의사 집안의 맥을 잇기 위해 경성치전으로 결정했다.

치전 2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당시 학교는 서울 소공동에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미도파 백화점 근처를 지나다가 불이 환히 켜진 5층에서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음악 소리를 들었다.

 

그 음악에 매료되어 5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미군 장교 클럽이었다. 재즈가 연주되고 있었다. 밴드 마스터에게 간청해 악보를 얻었다. 그때부터 재즈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작은 아마추어 악단을 조직해 아르바이트했다. 경기고에서 피아노를 잘 쳤던 박춘석을 영입했고, 길옥윤은 색소폰을 불었다. 음악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전공을 치대에서 음대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치대로 돌아와 겨우 졸업했다. 겨우 졸업한 까닭은 음악 활동을 하느라 치아 100개를 뽑는 임상실습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었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길옥윤은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비는 소중히 아끼던 전자 기타를 팔아 마련했다. 소지품은 가죽 책가방과 그 안에 든 팝송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일본에 간 목적은 재즈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천신만고 끝에 작곡가 오자와 히데오(小澤秀夫)의 제자가 되었다. 오자와는 길옥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스승이었다. 제자에게 예명을 지어 주었다. 일본의 소설가 요시야 노보코(吉屋信子)와 준 이치로(谷崎潤一郞)의 이름에서 따온 ‘요시야 준’(吉屋潤)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은 최치성(본래 이름)이 아니라 ‘길옥윤’이 되었다. 오자와 악단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후 길옥윤은 독립해 자신의 밴드를 만들었다. 그의 이름이 일본 전역에 알려졌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20대 때의 길옥윤. 출처=「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서울시 후원 ‘서울의 찬가’ 만들어 대성공

길옥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서울의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세계 큰 도시에는 거기에 맞는 노래들이 있었다.

 

마침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현옥 서울시장이 길옥윤에게 서울을 상징할 수 있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길옥윤의 소망과 김현옥의 열정이 합쳐져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로 시작하는 ‘서울의 찬가’가 탄생했다.

 

노래는 패티 김이 불렀다. 서울시의 강력한 후원으로 ‘서울의 찬가’는 동네 스피커를 통해 수시로 나왔다. 라디오에서도 길거리에서도 흘러나왔다. ‘서울의 찬가’가 대성공을 거두자 2탄으로 ‘서울의 모정’도 작곡했다.

정미조 데뷔 시키려다 이대 학칙 때문에 무산

길옥윤은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에 교수로 출강했다. 출강한 학과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설된 실용음악이었다. 그런데 교수 임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서울대 치대를 나오고 경희대 대학원에서 치의학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정식으로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장애가 있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준 사람이 국악과 학과장이었던 김희조였다.

 

당시 국악과에서는 교수 초빙 시 전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사례를 적용한 것이었다. 학과가 초창기 때라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의 표현대로 ‘배부터 만들어서 사람을 구해 태우고, 거기에다가 사공도 태우고 기관도 싣고, 내가 선장이 되어 무작정 항구를 떠나는 항해’와 같았다.

 

실음과 초창기 교수진은 길옥윤, 최창권, 정성조였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로 구성되었다. 서울예전에서 거의 1년 동안 매주 11시간의 수업을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수업시간의 몇 배나 되는 연구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교재까지 만들어야 했다. 그런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 음악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교수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길옥윤은 제자를 아끼고 사랑했다. 어떤 사람이 부산에서 가수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노래를 들어보니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가지 않고 매일 찾아왔다.

 

그래서 밴드 보이를 하라고 했다. 당시 가수 지망생들은 밴드 보이부터 시작했다. 밴드 보이는 악기를 나르고,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간혹 기회가 생기면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그와 정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알고 보니 폐가 전부터 나빴다. 집에 돌아가서 병을 고치고 오라 했다.

 

나중에 길옥윤은 그에게 곡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키가 아주 큰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기타를 들고 찾아왔다.

 

노래를 들어보니 잘 불렀다. 그래서 데뷔시키려고 했는데 학칙에 학생이 직업을 가지면 퇴학당하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결국 취입하지 못했다. 그는 홀로서기 해서 히트곡을 냈다. 그가 부른 대표적인 노래가 ‘개여울’이다. 그가 바로 가수 정미조이다.

서울 세종로공원에 세워진  ‘서울의 찬가’ 노래비.


일본서 패티 김과 첫 만남

패티 김을 처음 만난 곳은 일본이었다. 패티 김은 무용단과 함께 동경 국제극장에서 공연했다. 공연단을 인솔한 단장은 길옥윤과 친했다.

 

단장이 길옥윤에게 “목소리가 시원시원한 사람이 있으니 노래를 들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만났더니 실제로 목소리가 시원시원했고 행동도 세련되었다.

 

패티 김은 몇 가지 노래를 불렀고, 길옥윤은 몇 가지를 지적해주었다. 그것이 패티 김과 길옥윤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길옥윤은 일본에서 벌인 사업이 망해 급히 서울로 왔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때 다시 패티 김을 만났다. 지구레코드사에서 패티 김의 노래를 녹음하기로 했고 길옥윤은 편곡을 맡았다. 패티 김을 다시 만나니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길옥윤이 여관방에 홀로 누웠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처지가 처량했다.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 미친 듯이 곡을 썼다. 그 노래가 ‘4월이 가면’이었다.

 

길옥윤은 한밤중에 패티 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그 곡을 들려주었다. 길옥윤은 패티 김이 절망에 빠진 자신을 구원해줄 빛이라 생각했다.

 

패티 김과 함께 전방부대 위문공연을 갔다. 두 사람은 꼭 붙어 다녔다. 공연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차 사고가 났다. 탑승한 사람 중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 자신들도 희생자가 될 뻔한 것을 알고 깊이 안도했다.

그해 두 사람은 결혼했다. 주례는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이 섰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 중에 월남으로 갔다. 자진해서 파월장병들을 위문하러 간 것이었다.

 

그곳에서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최명신 장군을 만났다. 헬기를 타고 총탄이 쏟아지는 고지를 찾아갔다. 악기는 기타뿐이었다.

 

죽음과 마주한 최전방의 병사들 모습은 실로 처절하고 눈물겨웠다. 부부는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래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