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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6) 길옥윤 요셉 (하)

dariaofs 2023. 12. 15. 00:04

직접 지은 노래 ‘이별’ 처럼 아내와 헤어지고 성가 작곡에 혼신

 

행복했던 시절 길옥윤 부부. 출처=「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패티 김과의 약속대로
동경 국제가요제 출전
‘사랑은 영원히’ 동상 수상

일본인 팬과 가톨릭 인연 
세례받고 천주교 신자돼

갑자기 쓰러져 악성 암 진단·투병
병상에 누워 하느님 나라 비유 묵상
‘한 알의 겨자씨’ 만들고 성가 앨범까지 제작


길옥윤(요셉, 1927-1995, 吉屋潤)과 패티 김은 안정적인 결혼생활 덕에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다. 만드는 노래마다 히트했다.

 

두 사람은 1년 예정의 세계 여행을 떠났다. 6개월 후에 패티 김은 서울로 돌아왔고, 길옥윤은 재즈를 더 공부하려고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곳 맨해튼음악학교에서 재즈를 공부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계 여행은 두 사람을 갈라놓은 여행이 되고 말았다. 패티 김이 서울로 떠난 다음 하와이에 홀로 남은 길옥윤은 달이 뜬 바닷가를 바라보며 곡을 떠올렸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사랑이란 즐겁게 왔다가 슬프게 가는 것/ 훌라춤에 흥겹던 기쁨도 모래알에 새겨진 사연도…’라고 부르는 ‘하와이 연정’을 만들었다. 노래 가사에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 이 노래는 패티 김이 불러 대히트했다.

 

어느 날 밤에는 술에 취해 창가에 앉아 달을 바라보다가 악상이 떠올랐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으로 시작하는 ‘이별’이란 곡이다. 이 노래도 패티 김이 불러 크게 히트했다.

 

길옥윤은 자신이 만든 노래가 자신의 운명에 적중하는 것을 늘 느끼곤 했다. 특히 ‘이별’을 썼을 때, 패티 김과 이별할 것을 예감했고, 그것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 길옥윤은 패티 김과 헤어지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세계가요제에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 약속은 지켜졌다. ‘봄날에는 꽃안개/ 아름다운 꿈속에서/ 처음 그대를 만났네’로 시작하는 ‘사랑은 영원히’가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자랑스럽게도 동상을 받았다.

두 사람 갈라놓은 세계 여행

길옥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고향 평안도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어머니는 선교사 밑에서 교육받은 신심 깊은 신자였다.

 

가족 모두가 교회에 나갔다. 집에는 피아노가 있어 주일에는 집에서 부흥회도 열었다. 그런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기에 교회에 꼭 나갔고, 합창단에서도 활동했다.

 

그 후의 신앙생활은 독실하지 못했다. 오로지 노래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길옥윤에게 신앙이 우연히 찾아왔다. 우연이라기보다는 운명이었다.

길옥윤의 오래된 일본인 팬이 있었는데 그는 길옥윤에게 한국말을 배우고 일이 있을 때 도와주곤 했다. 길옥윤의 딸 안리는 그를 ‘작은 아빠’라 불렀다. 그는 한국 여성과 사귀었다.

 

그 여성이 천주교 신자였다. 그 남자는 3년 동안 한국 성당에 나가면서 교리 공부를 했다. 그러고는 성탄절에 성마리아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길옥윤도 그 미사에 참여해 축하해주었다.

 

그 전에 그는 길옥윤의 딸 안리에게 자신이 다니는 성당에 한번 가자고 제안했다. 안리는 물론 길옥윤 내외까지 같이 갔다. 그리하여 길옥윤이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갔던 성당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갔다.

 

그 후 주일마다 성당에 갔다. 그러고는 예비신자교리반에 들어가 1년 동안 교리 공부를 했다. 성경 공부도 하고 성가대의 피아노 반주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이렇게 해서 길옥윤은 일본에서 ‘요한’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길옥윤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성당에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가집을 내는 것이었다. 한 가지 약속은 이행했다.

 

작곡노트 중 한 알의 겨자씨. 출처=「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어머니와 ‘천주교 신자 되기·성가집 내기’ 약속

길옥윤은 방송국 드라마 주제곡 작곡 때문에 우리나라를 잠깐 방문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가 며칠 안 되어 쓰러졌다. 그는 건강했었다. 30여 년 동안 매일 체육관에서 운동하며 체력을 관리했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이 빨리 늙고, 음악 활동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건강했던 몸에 악성 암이 쳐들어 들어온 것이다.

 

길옥윤은 구급차를 타고 갔다. 그는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병원에서는 모든 의료기기를 동원해 진단했다.

 

뢴트겐을 100여 장이나 찍었고, CT를 비롯해 초음파 검사를 했다. 결과는 폐에 있던 결핵균이 척추로 옮겨와 척추에 종양이 생긴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동경여의대 부속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했다. 그 병원에서 반년 이상을 혹독하게 병마와 싸웠다.

다섯 시간 암 수술…수술실에서 나온 ‘새로운 나’

암 수술을 했다. 수술 전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좋은 노래로 더욱 기쁜 찬양을 드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성모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수술은 장장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길옥윤은 그 다섯 시간을 ‘5백억 광년’의 시간이라 했다. ‘과거의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 죽었고, 수술실에서 나온 사람은 ‘새로운 나’라고 여겼다.

 

이제부터 오로지 사랑이 담긴 음악만을 만들고, 진실이 담긴 얘기만 하고, 쓸데없는 사람은 만나지 말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간은 오직 음악과 예술과 찬양을 위해서만 쓸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 최우선으로 둔 것이 성가 작곡이었다. 길옥윤을 영적으로 지도해준 신부도 늘 “길옥윤이 만든 성모송이나 주님의 기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길옥윤은 그동안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곡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거룩한 교회 음악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가톨릭 음악을 ‘제일 큰 사랑의 노래’, ‘제일 깊은 사랑의 노래’, ‘영원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병상에 누워 미사를 생각했다. 성경에 하느님 나라를 한 알의 겨자씨에 비유한 말씀이 있다. 길옥윤은 그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 그랬더니 영감이 떠올랐다. 그래서 급히 작곡 노트에 곡을 써나갔다.

 

성가 제목은 ‘한 알의 겨자씨’였다. 가사는 “뿌려진 씨앗은/ 어느덧 싹트고/ 이삭이 되고/ 낟알이 맺힌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견주나/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비유하나/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 같아/ 보잘것 없어도/ 조그만 씨앗은/ 자라고 뻗어서/ 드높은 하늘로/ 가지를 뻗치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게 되리라”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길옥윤 복음 성가’ 앨범 한 권이 만들어졌다. 앨범에는 아름다운 성가 14곡이 담겼다.

 

‘한 알의 겨자씨’를 비롯해 ‘길 되신 예수’, ‘나는 거닐리라’, ‘나는 순례자’, ‘믿음’, ‘보이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 ‘소망’, ‘시간은 자꾸 가는데’, ‘영원한 삶’, ‘외쳐보아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 ‘주님’이었다. 노래는 이기헌 주교, 김영자 수녀, 최희준(티모테오), 탤런트 김희애(마리아), 진성만, 정경화가 불렀다.

 

이 앨범은 최희준이 주도했고, 영화인 김지미(체칠리아)가 제작비를 지원했다. 길옥윤은 이렇게 해서 성가집을 만들겠다는 어머니와의 두 번째 약속을 지켰다.

 

사랑하는 딸 정아와 함께. 출처=「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7개월 투병 기록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처음으로 샤워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마치 나치 감옥에 있던 유다인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뼈하고 가죽만 남은 몸이었다.

 

길옥윤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는 이제껏 자신이 걸어온 삶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해 5월부터 12월까지의 투병 기록을 20여 개 카세트 테이프에 담았다.

 

그 안에는 고통스러웠던 투병 과정을 비롯해 과거의 화려했던 삶, 힘들었던 삶, 그리고 지우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삶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또한 마지막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성가를 작곡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도 담았다. 이렇게 기록한 것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책 제목은 「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 없다」로 ‘길옥윤 참회록’이란 작은 제목을 달았다.

결국 길옥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식장에서 입관 예절을 끝내고는 관에 소중히 아끼던 묵주와 색소폰을 넣어주었다. 장례 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봉헌되었다.

 

영결식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거행되었다. 최희준이 사회를 보았고 패티 김이 조가(弔歌)로 ‘서울의 찬가’를 불렀다. 그리고 연예인 색소폰 연주자 50여 명이 관을 운구했다.

참고 자료 : ▲길옥윤 「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 조선일보사. 1995 ▲임진모 「유행가 3·6·5」 스코어. 2022 ▲가톨릭신문(1995.3.26.) ‘길옥윤 씨 추모 행사 마련’ ▲가톨릭신문(1996.2.4) ‘길옥윤 유작 성가집 「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