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의 다빈치… 극작부터 연출·이론·경영·교육까지 다재다능
유치진은 세계 연극 기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통해 무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드라마센터를 짓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미국 록펠러재단에 편지를 보냈다. 고맙게도 재단에서 지원금을 보내왔다. 그 지원금은 센터를 짓는데 일부분밖에 되지 못했다.
집에 있는 재산을 모두 건축비로 사용했다. 그런데도 돈이 많이 부족했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다. 그런데 융자받은 돈을 제때 갚지 못해 수십 년 동안 살던 집과 처남의 집, 남은 부동산까지 모두 처분했다.
이제 유치진의 가족이 살 수 있는 곳은 드라마센터 뒤쪽에 임시로 마련한 거처뿐이었다. 드라마센터 설계는 건축가 김중업이 맡았다. 천신만고 끝에 드라마센터가 완공되었다.
드라마센터는 서양의 고대극장과 근대극장 구조를 모델로 했으나 가톨릭 성당 구조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유치진은 ‘객석 뒤의 원형 무대는 그리스의 야외극장을 본뜬 것이지만 힌트는 사실 가톨릭교회의 성가대 무대에서 얻었다’고 했다.
개관기념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올라갔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육영수 여사와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이후에도 드라마센터는 계속해서 공연을 올렸다. 그렇지만 공연 적자는 끝없이 불어났다. 이에 유치진은 처절한 고통을 느꼈다.
“사람이 빚에 시달리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럽고 치사스러운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참으로 인격이니 체면이니 하는 것도 없다. 그것은 고문 그 자체이고, 오직 정글의 법칙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센터는 공연뿐만 인재 육성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문 연기자와 학구적 연극 인재를 키운다는 목적으로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연극아카데미는 후에 서울예술대학교로 도약 발전하게 된다.
그곳에서 연극, 영화, 방송, 문학, 음악, 무용, 디자인 분야에서 기라성같은 예술가를 배출했다. 연기 분야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신구, 전무송, 이호재, 정동환, 독고영재, 길용우, 유동근, 박상원, 최민수, 신동엽, 황정민, 전도연, 김하늘, 손예진 등을 들 수 있다.
배우 ‘신구’ 이름 지어준 선생님
유치진과 제자들과의 따뜻한 일화가 전해진다. “내 이름은 원래 신순기다. 동랑(유치진의 호) 선생님이 ‘신순기’는 배우 이름으로는 너무 촌스러우니 하나 지어주시겠다 말씀하셨다.
…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서재로 부르시더니 종이에 내 이름을 불쑥 써서 내미셨다. 바로 ‘신구(申久)’였다. … 내게 영원히 붙어있는 선생님의 그림자는 바로 내 이름의 두 글자 ‘신구’다.”(신구)
“선생님은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해. 술과 여자를 조심해라. 넌 민들레 씨앗 같은 배우가 돼서 이 척박한 연극 풍토에 꽃을 피워야 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민들레 씨앗’은 내 인생의 지침이 되고 있다.”(전무송)
“주인공이었던 내가 무대에서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내 팬티를 보시더니 당장 빨간 팬티를 사오라고 하셨다. 빨간 팬티를 사왔더니 입으라 하셨다.
옷을 갈아입는 공연 장면에서 빨간 팬티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지적해주신 선생님의 연출 감각에 모두 놀랐다.”(이호재)
“나는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무대의 막을 올리고 내리는 것을 배웠다. 선생님은 ‘연극은 막을 여는 것에서 시작해 막을 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막이 잘못 올라가면 연극 또한 시작부터 잘못되는 것이다. 막을 내릴 때도 역시 제때 내리지 못하면 마무리가 잘못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지금도 내가 무대에 설 때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정동환)
6·25 전쟁으로 가톨릭과 인연
유치진은 자신의 수필 ‘나의 이상적 여성 타입’에서 자애로 넘치는 성모 마리아를 ‘나의 영원한 동경이며, 구원(久遠)의 여성상’이라고 했다.
유치진은 극예술연구회가 제작한 영화 ‘애련송’에서 비록 단역이기는 하지만 자청해서 신부(神父) 역을 맡았다. 가톨릭과 직접적인 인연은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였다.
유치진은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 국제시장 위쪽에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지리한 피난 생활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병으로 나타났다. 유치진은 만성 맹장염을 앓았고, 딸은 폐렴, 큰아들은 늑막염, 막내아들은 심장병을 앓았다. 그래서 밤이면 온 식구의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다행히 미국 가톨릭 선교회가 운영하는 메리놀병원에서 삼 남매가 무료로 치료받아 병이 모두 나았다. 유치진 부부는 이에 크게 감격했고 가톨릭에 깊은 호감을 가졌다.
부인과 아이들이 가톨릭에 입교하기 위해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유치진의 가톨릭 입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장발 루도비코였다.
그는 예술원 창립 때부터 유치진과 함께 일해오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유치진은 6개월 동안 꼬박 교리 공부를 했다. 유치진 부부는 서울 세종로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박귀훈 신부가 세례성사를 집전했고, 대부는 장발이었다. 유치진의 세례명은 ‘돈보스코’이고 부인 심재순의 세례명은 ‘데레사’였다.
그 세례식은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정치계, 학계, 경제계 등 사회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 33인이 집단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성야’ ‘이름 없는 꽃들’ 등 연극 통해 선교
유치진은 가톨릭 신앙을 연극으로 보답했다. 연극을 통해 선교활동을 한 것이다.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오혜령 작가의 단막극 ‘성야(聖夜)’를 유치진이 직접 연출했다.
오 작가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다. 유치진은 자신이 추구하는 수도자의 성속(聖俗) 문제를 오 작가가 대담하게 묘사한 것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유치진은 오 작가를 유난히 아꼈다. 오 작가가 두 번째로 쓴 ‘인간적인 진실로 인간적인’도 직접 연출했다. 이 작품 역시 가톨릭 신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다. 서울대교구는 유치진을 초청해 문화행사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
유치진은 노기남 대주교와 친분이 깊었다. 노 대주교는 드라마센터에서 가톨릭 정신을 기리는 작품이 공연되기를 희망했다.
유치진은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문화계 대표로 참여해 연극 공연으로 화답했다. 그 작품은 가톨릭시보사가 공모한 ‘이름 없는 꽃들’로 김대건 신부의 일생을 다룬 극이었다.
극단 드라마센터가 이 작품을 올렸다. 수많은 교우가 공연을 관람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중진 작가가 쓴 작품 ‘김대건 신부’를 드라마센터 무대에 또다시 올렸다.
또한 유치진은 가톨릭문우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회원은 시인 구상과 김남조, 극작가 이서구, 아동문학가 이석현, 평론가 구중서와 임중빈 등이었다.
그런데 임중빈이 「다리」지 필화사건으로 용공의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문우회는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유물론적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평론가’라는 진정서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했는데 유치진도 이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유치진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전교 사업의 일환으로 TV ‘드라마’ 상영을 계획하고 앞으로의 방향과 상영에 대한 의견을 듣는 모임에 초대되어 기탄없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이렇게 유치진은 가톨릭 복음화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유치진은 연극인 간담회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뇌 내출혈로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치료했으나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드라마센터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 미사는 유치진에게 세례를 준 박귀훈 신부 집전의 연극인장으로 거행되었다.
“유치진은 창작이나 이론 같은 어느 한 분야에 전념해온 예술인이 아니라 극작과 연출, 이론, 경영, 교육 등 연극의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게 활약했기 때문에 문단의 이광수와 비견될만한 다빈치적인 인물이다.”(연극평론가 유민영)
참고자료 : ▲유치진 「동랑 유치진 전집 9」(자서전). 1993. 서울예대출판부 ▲유민영 「한국연극의 아버지 동랑 유치진」 태학사. 2015 ▲백형찬 「한국예술의 큰 별 동랑 유치진」 살림지식총서 451. 살림출판사 ▲가톨릭신문(1972.3.12) ‘풍자극 금관의 예수-이동진 작·최종률 연출’ ▲가톨릭신문(1964.10.11) ‘서울 세종로본당에서 10월 1일 저명인사 33명 입교’ ▲가톨릭신문(1966.1.23) ‘TV에 전교 「드라마」, 의견 청취 CCK 신자 작가 초대’ ▲가톨릭신문(1971.6.27.) ‘가톨릭 문우회, 당국에 진정서 제출’ ▲가톨릭신문(1970.6.7) ‘가톨릭문우회 창립’ ▲서울예술대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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