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열전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2. 을사추조 적발사건

dariaofs 2024. 1. 16. 00:39

명례방 집회 적발, 조선 사회에서 공적으로 드러난 첫 장면

 

한국 교회 설립 초기 신자들은 명례방(지금의 서울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면서 신앙을 키워나갔다. 그림은 ‘명례방 집회’.(김태 작, 1984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 열고 전례 거행

선교사의 입국과 전교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책을 통해서 성교회의 도리를 찾고 실천한 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독특한 특징이며,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의 시작에는 평신도 교우들의 활동과 문서 전교의 힘이 돋보였다.

 

이처럼 양반과 중인 중심으로 모인 한국의 초기 교회 공동체는 이벽의 집에서의 세례 공동체에서 출발하여, 좀더 큰 집으로 곧 명례방(明禮坊) 김범우의 집으로 그 집회 장소가 옮겨졌다.

 

오늘날 장악원(掌樂院) 표석이 있는 곳 앞쪽에 김범우의 집에서 이루어진 집회의 내용을 살펴본다.

“을사년(1785) 봄에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장례원(掌禮院) 앞에 있는 중인 김범우 집에서 설법(說法)하였는데, 이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

 

추조(秋曹)의 금리가 그 모임이 술 먹고 노름하는 것인가 의심하여 들어가 본 즉, 모두가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썼으며 거동이 해괴하고 이상스러워서, 드디어 체포하고 예수의 화상(畵像)과 서적들 및 몇 가지 물건을 추조에 바쳤다.”(「벽위편」 중에서)

세례식을 통해 시작된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그 집회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모임에서는 주로 세례를 주는 입장에 있었던 이승훈이 주관하기보다 이벽이 나서서 설법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설법이라는 불교용어를 쓴 것은 당시 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천당지옥설을 주장하던 천주교가 불교의 한 부류나 별파(別派)로 보였기 때문에 강론이나 설교를 하는 것을 가리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벽이 이 모임에서 강론을 했다는 것은 초기 공동체에서 이벽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양반과 중인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대표로 나서서 강론할 수 있다는 것은 이벽의 교리 지식이 그만큼 출중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는 단순히 말씀의 전례만 거행된 것 같지 않다. 그들의 복장이나 모습이 특별하고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동이 해괴하고 이상”했다고 한 것은 아마도, 성호를 긋거나 합장 혹은 장궤를 하는 전례 동작을 가리키는 것 같다. 도대체 저들은 무엇을 하는 것이길래, 손으로 이마와 양어깨와 가슴까지 무슨 표식을 하는 것일까?

 

서울 명례방(명동)에 위치한 장악원(조선 시대 음악의 편찬 교육행정을 맡았던 관아) 터 표석 사진. 표석 앞쪽에 신앙 공동체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한 김범우의 집이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분 바른 얼굴에 청색 두건을 둘렀다”

그리고 이 예식에서 이루어졌던 그들의 복장이나 모습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 있다. 한자어로 ‘분면청건(粉面靑巾)’으로 되어 있는 이 부분을 풀이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은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정식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백인이고, 세례를 주는 이들을 모두 신부(神父)라고 불렀다.

 

이제 이승훈은 조선에 돌아와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신부’가 되었다. 그래서 초기 한국 교회의 용법 중에 세례를 주는 이는 ‘신부’, 교리를 가르쳐주는 이를 ‘대부(代父)’라고 부르는 특이한 용법이 있었다.

예를 들어 최창현은 이승훈을 신부로, 정약전을 대부로 택했다고 하는데, 그에게 도리를 가르쳐 준 이가 정약전이요, 세례를 준 이가 이승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용법은 주문모 신부가 온 이후로 바로 잡혔을 것이다. 사제품을 받아 인호(印號)를 받은 이가 신부요, 영적인 아버지 곧 대자(代子)를 위해 모범이 되는 이가 대부이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해 보면, 그들이 분을 바른 이유는 모두 세례를 줄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신부(神父)의 행세로서 백인의 모습으로 분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상식적으로 크게 납득가지 않은 설명이다.

둘째, 이 집회는 봄에 있었고, 특히 이 모임의 주례자인 이벽은 “푸른 두건을 머리에 쓰고 어깨에 드리운 채 정 가운데에 앉아”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서양 선교사가 쓰던 동파건(東坡巾)을 모방하여 제건(祭巾: 오늘날 ‘비레타’처럼 생긴 모자에 양옆에 띠가 달린 모양)을 만들어 쓴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청색을 나타내는 이 띠는 당시에 단식을 해야 하는 성회례의(聖灰禮儀, 재의 수요일), 성금요일 및 사순 시기 금요일 등에 특별히 사용하던 전례 도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예식을 오늘날 재의 수요일 예식에 재를 얹는 예식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최근에 이 모임이 있었던 날이 순암 안정복의 일기 메모를 통해서 1785년 음력 3월 9일(양력 4월 17일)로 확인되며, 부활 시기 주일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곧 이 모임은 주일 집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주일 집회 모임의 중요성 때문에 그들은 온전한 복장과 몸을 단장함으로써 몸가짐을 바르게 하기 위한 방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분면청건(粉面靑巾)’, 곧 “분 바른 얼굴에 청색 두건을 둘렀다”고 하는 이 네 글자의 해석의 가능성은 아직도 열려 있다.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 초상.(조영동 작)


형조에 적발돼 유배지에서 김범우 순교

불행하게 이 모임은 형조에 의해 적발되었고, 관련자들은 조사를 받게 되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양반의 자제들을 타일러 귀가시키고, 집주인이자 중인(中人) 신분이었던 김범우 토마스만을 문책하고 가두었다.

 

권일신 등 몇 사람은 추조에 들어가 성상(聖像)을 돌려달라고 호소하였으나, 판서는 그들을 꾸짖고 달래면서 내보내고, 결국 김범우를 유배보냈다. 형조 관련 기록인 「추관지」에는 김범우와 관련된 문초 기록이 남아 있다.

“(…) 김범우는 ‘서양 학문에는 좋은 면이 많으며, 그릇된 점은 알지 못한다’고 했으므로 1차로 엄히 매질했습니다.

 

또 최인길이 ‘함께 사학 서적을 보았으니, 같은 죄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 꾸짖고 곤장을 친 다음 김범우와 함께 수감했습니다.

 

(…) 최인길은 곤장을 쳐서 풀어 주었고, 김범우는 도배(徒配, 중노동을 시킨 뒤 유배)를 보냈으며, 간직한 서적은 모두 형조의 뜰에서 불태웠습니다.”

김범우 토마스는 신앙의 증거 때문에 유배형을 받게 된 것이고, 유배지에서 끝까지 신앙을 간직하고 선종하였기 때문에 순교(殉敎)로 볼 수 있다.

 

그동안 그의 순교에 대한 의심이 있었던 것은 그의 죽음이 장독(杖毒)에 의한 것인지가 분명치 않아서 그런 것이었는데,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의 뛰어난 신앙과 증거로 볼 때 순교로 확정 지어 지금 순교자로서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