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4년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dariaofs 2024. 1. 14. 01:21

[말씀묵상] - 세례자 요한과 안드레아의 고백

 

제1독서 1사무 3,3ㄴ-10.19 / 제2독서 1코린 6,13ㄷ-15ㄱ.17-20 / 복음 요한 1,35-42

 

디에릭 보우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네 권의 복음서, 그보다 더 많은 원천들

첫 번째 신앙인들은 한 분 예수님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으며, 마침내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런 다양성은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 분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복음서는, 하나가 아니라 ‘넷’입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한 복음서 안에서도 서로 다른 표현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요한 10,11)로 비유하시다가도, 이윽고 당신을 “참 포도나무”(요한 15,1)라고도 하십니다.

 

이 두 표현의 건너편에는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이 비칩니다. 한편에는 양을 길러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또 한쪽은 포도나무를 길러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지요. 정리하자면 유목 사회의 신앙 전통과, 농경 사회의 신앙 전통이 반영되어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복음서는 예수님이라는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네 줄기의 큰 흐름입니다. 그리고 한 권의 복음서 안에도,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여러 신앙 작은 줄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두 가지 고백, 표현 너머에 흐르는 것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복음 이야기에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두 표현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0,36) 그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는 자기 형을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0,41)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 이야기 앞부분에서 요한은 고백에 말꼬리를 달아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아마도 이 표현은 많은 것들을 연상시키겠지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어린양. 사람의 악행과 죄악을 짊어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이사 53장)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자 잡았던 어린양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탈출 13장) 혹은 대속죄일에 대사제가 백성의 죄를 지워 광야에 풀어놓던 숫염소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레위 16장)

 

그 어느 쪽을 떠올리건 간에 ‘어린양’이라는 고백은 지금까지의 전통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전통에 마음을 걸어두고 하느님을 찾아온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의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모든 유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율법에서 메시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메시아를 기대하던 사람들끼리도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달랐습니다.

 

과연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요. 안드레아가 ‘메시아’라는 단어에 어떤 마음을 담았을지 알 길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당대의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만큼이나 ‘현실’이 중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메시아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이 고백하며 자신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반면, 안드레아는 적극적으로 찾아나섭니다.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또 다른 이를 초대합니다. 어떤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전통 안에 머물던 세례자 요한, 새로운 변화를 꿈꾸던 안드레아, 두 사람의 고백은 같은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느낌을 줍니다.

 

표현의 뼈대를 이루는 낱말의 질감이 다르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나 방향성도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고백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물려받은 말과 새로운 삶

사실 그들의 신앙고백은 물려받은 낱말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답답한 현실 가운데 어떤 변화를 기대한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고백했습니다. 종이에 말라붙은 글자를 더듬어가는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물려받은 신앙의 언어 가운데 자신의 삶과 마음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것을 골라내어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반복한 것이 아니라성찰하고 실천하고 기대한 것을 물려받은 낱말로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느님의 어린양’과 ‘메시아’는 그것이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당연한 말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 낱말에 어떤 마음을 담아내고 있을까요. 우리의 삶의 자리가 다른 만큼 우리에게 어울리는 신앙고백이 따로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고백을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찾는”(요한 1,38)지, 예수님께 “와서 보”(요한 1,39)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이 멀리 있지도 않습니다. 먼저 집으시고 읽어보시기를!(Tolle, Lege!)

※ 전형철 신부는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2018년 대구대교구 사제로 서품됐다. 사목과 학업의 장을 오가며 종교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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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천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국내연학